'히잡 쓴 힌두교도가 로힝야족?' 딱걸린 방화조작 사진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미얀마 정부의 주선으로 최근 로힝야족 유혈사태가 벌어진 서부 라카인주(州) 현장 취재에 나섰던 내외신 기자들에게 한 불교 승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힝야족의 집에 불을 지른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로힝야족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도 있다"
잠시 후 이 승려를 잘 안다는 불교도 남성은 자신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직접 찍은 것이라면서 몇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에는 로힝야족 마을의 한 가옥에서 지붕에 무언가를 뿌리고 이어 불을 붙이는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불을 지르는 남성은 연두색과 보라색 계열의 체크무늬 상의를 입었고, 여성은 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히잡과 유사한 흰 천을 쓰고 흰색과 주황색이 들어간 상의를 착용했다.
계속되는 로힝야족 거주지 방화를 둘러싸고 난민과 미얀마 정부가 엇갈린 주장을 펴는 상황에서, 이 사진은 로힝야족 무장세력을 방화의 배후로 지목한 미얀마 정부의 선전전에도 활용됐다.
양곤에 본부를 둔 현지 언론인 일레븐 미디어그룹이 이 사진을 보도하자, 정부 대변인인 저 타이는 보도된 사진 링크를 트위터에 게시하고 "벵갈리(로힝야족)들이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사진"이라는 설명도 달았다.
그러나 이 사진은 현장 취재에 동행했던 일부 기자들에 의해 조작된 '가짜 뉴스'로 판명 났다고 AP통신이 12일 보도했다.
기자들에게 방화범을 제보한 승려가 로힝야족이라고 소개했던 사진 속 인물들이 인근 학교에 마련된 임시 난민 캠프에 수용되어 있던 힌두교도들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우연히 밝혀진 것이다.
AP통신은 "사진이 찍힌 날짜는 분명치 않지만, 힌두교도 난민들을 수용한 학교에서 찍힌 남성과 여성이 로힝야족의 방화 자작극의 주범으로 소개됐던 인물과 같은 옷을 입은 동일인으로 확인됐다"고 소개했다.
히잡과 같은 흰 테이블보를 머리에 두르고 주황색 상의를 입었던 사진 속 여성은 통신과 인터뷰 당시 자신을 여섯 아이를 둔 하줄리라고 소개하고 로힝야족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사를 하는데 칼라(로힝야족을 낮춰 부르는 말)가 마을에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몽둥이와 창을 들고 '우리는 힌두교도의 피로 샤워를 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쳤다. 이슬람교도가 있는 한 분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결국, 주류인 불교도와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의 갈등 속에 중간지대에 있던 힌두교도가 자의 또는 타의로 방화사건 조작에 휘말렸고, 로힝야족 인종청소에 주장을 '가짜 뉴스'라고 폄하했던 미얀마 정부가 조작된 사진을 로힝야족의 '방화 자작극' 홍보에 활용한 셈이다.
실제로 미얀마를 빠져나온 난민들은 일부 힌두교도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불교도들의 강압에 마지못해 로힝야족 탄압에 가담하기도 했고, 이를 거부하다가 죽음을 맞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지난달 25일 대미얀마 항전을 선포한 로힝야족 반군단체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의 경찰초소 습격사건으로 촉발된 유혈사태로 지금까지 4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30만명이 넘는 난민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도피했다.
또 국제인권단체의 위성사진 분석결과 지난달 25일 유혈사태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수천 채의 민가가 불에 탔다.
난민과 인권단체 등은 반군 소탕에 나선 미얀마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면서 로힝야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얀마군은 방화와 민간인 학살 배후로 ARSA를 지목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최근에는 터키 부총리가 로힝야족 학살 반대를 외치는 트위터 게시물과 함께 르완다 아이가 울고 있는 사진을 잘못 게재했다가 삭제하는 일도 있었다.
실권자인 아웅산 수치는 터키 부총리의 사례를 거론하며 로힝야족 학살 주장이 '가짜 뉴스'라고 주장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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