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 말해줘서 감사해요'…영화 '아이 캔 스피크'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끝나지 않은 슬픔,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한 편의 영화가 추석 극장가의 문을 두드린다. 9월 말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다.
비록 스크린이지만 아픈 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편치 않다. 그래서 더 외면하게 되는지 모른다. 영화는 그런 관객의 마음을 헤아리듯 조금은 에둘러 간다. 유머와 위트로 무장해제를 시킨 뒤 후반부에 가서야 속도를 내며 직진으로 내달린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얼한 감동과 교훈이 기다리고 있다.
나옥분 할머니(나문희 분)와 9급 구청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주인공이다.
철거위기에 처한 재래시장에서 옷 수선을 하며 홀로 생계를 꾸려가는 할머니는 구청의 '블랙리스트 1호'다. 수십 년간 제기한 민원만 8천건. 족발 가게 앞에 불법으로 세워진 입간판을 신고하는 등 시장 내 사소한 불법행위도 샅샅이 찾아내 매일 구청 문을 두드린다.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 구청 직원들은 모두 눈길을 피하고, 몸을 숨기느라 바쁘다.
원칙주의자에다 까칠한 성격의 민재는 전근 온 첫날부터 옥분 할머니와 신경전을 벌인다.
초반에는 할머니와 손자뻘인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며 기 싸움을 펼치는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앙숙이던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옥분 할머니가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면서부터.
학원에 다녀도 도통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아 고민하던 할머니는 민재가 유창한 영어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졸라 과외를 받는다.
두 사람의 공부 모습 역시 웃음을 자아낸다. 민재는 할머니를 위해 노래에 영어 표현을 넣어 녹음을 해주거나, 알까기를 하며 영어 표현을 가르친다.
소소한 웃음을 주며 잔잔하게 흘러가던 영화는 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는 진짜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감동 드라마로 전환한다.
아픈 과거를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60년간 혼자 삭여온 할머니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미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대목에서 감동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 장면은 실제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의회에서 촬영됐다.
나문희는 관록의 연기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영화 '수상한 그녀'의 욕쟁이 할머니 오말순 등 어떤 역할이든 혼연일체가 되는 그는 이 작품에서도 대체불가의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중년 배우로서 쉽지 않았을 긴 호흡의 영어 대사도 거뜬히 해냈다.
나문희는 6일 시사회 이후 간담회에서 "저는 자신감도 없고 소심한 성격이라 누구 앞에 말하고 이런 것이 어렵다"면서 "이 영화의 대본을 받았을 때 '말할 수 있다'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 "대본을 읽다 보니 위안부 할머니들이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머리에 얹고 살았을까 가슴이 아팠다"면서 "그래서 배우로서, 영화로서 한몫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올여름 영화 '박열'로 연기와 흥행을 다잡은 이제훈은 절제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듯한 연기로 나문희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민재의 상사로 속사포 유머를 담당한 박철민을 비롯해 공무원 직원들과 시장 사람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감초 연기도 극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CJ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75: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됐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고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2007년 미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을 채택했던 것을 모티브로 했다.
'쎄시봉'(2015), '시라노:연애조작단'(2010), '스카우트'(2007) 등을 통해 따뜻한 유머를 보여줬던 김현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김 감독은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다룬 영화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우회적으로 피해자들의 후일담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면서 "코미디와 영화의 메시지가 최대한 따로 놀지 않게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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