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 새겨진 빼앗긴 자의 슬픔…영화 '윈드 리버'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의 인디언 보호구역 윈드 리버.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설원 위를 무언가에 쫓기듯 맨발로 내달리던 한 소녀가 결국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얼마 뒤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코리(제러미 레너)가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고, 신참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이 사건 해결을 위해 이곳에 온다.
3년 전 자신의 딸을 비슷하게 잃은 코리는 제인의 수사에 협조하고, 범인 추적에 나선다.
온통 눈밭으로 가득한 이 외딴 지역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화 '윈드 리버'는 범인의 정체를 쫓는 범죄수사 물이지만, 일반적인 범죄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잔혹한 범죄 묘사에 치중하지 않는다. 대신 범죄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부모와 남겨진 가족에게 카메라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다. 부모는 큰 소리로 울부짖지 않는다. 너무 아프면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가슴속에 슬픔을 삼키며 고통을 키운다.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와 '로스트 인 더스트'(2016)의 각본을 쓴 테일러 쉐리던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시카리오'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있는 무법 도시 후아레스를 배경으로 한 범죄물이고, '로스트 인 더스트'는 황량한 서부 텍사스를 무대로 한 영화다.
'윈드 리버' 역시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다. 배경 자체가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극 중 윈드 리버는 수시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방한 장비 없이 뛸 경우 얼마 못 가서 폐가 얼어붙어 피를 토하며 죽는 극한 지역이다.
스크린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한기가 전해지지만, 그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뜨겁다. 사건의 진실이 새하얀 눈밭 위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수록 먹먹한 현실이 함께 드러나면서 분노와 슬픔을 자아낸다.
영화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현실을 담는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이들 중 상당수가 알코올과 마약 등에 빠져 지내며 기약 없는 내일을 살아가고 있다.
극 중 양 떼를 노리는 야생동물, 목장까지 내려와 소를 사냥하는 표범 등은 외부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인디언들이 처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백인이지만 인디언 여성과 결혼했던 코리는 범인을 잡은 뒤 "우리 가족은 여기서 100년 가까이 살았어. 빼앗기지 않은 건 이 눈과 지루함 뿐이지. 넌 뭘 빼앗았지?"라고 묻는다. 하지만 범인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빼앗았는지 알지 못한다.
쉐리던 감독은 제작 노트에서 "현재 미국의 국경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 영화에서 다룬 일들은 제 아메리칸 인디인 친구들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 말했다.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본 레거시' 등을 통해 액션 배우로 거듭난 제러미 레너가 이 작품에서는 섬세한 감정 연기를 보여줬다. 제러미 레너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동반 출연했던 엘리자베스 올슨은 FBI 요원 역을 맡아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지난 8월 초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29위로 출발했으나 입소문을 타고 순위가 오르더니 개봉 5주차인 지난주에는 3위까지 오르며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다. 9월 14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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