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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공작원' 유해 안치됐지만…풀리지 않는 유족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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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공작원' 유해 안치됐지만…풀리지 않는 유족의 한

46년만에 합동봉안식 거행…유해 4구는 아직도 못 찾아




(고양=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군악대가 연주하는 장엄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공군 의장대 병사들이 하얀 보자기에 싸인 유골함을 하나씩 들고 질서정연하게 걸어들어왔다.

가로로 여섯, 세로로 넷, 모두 24위(位)의 유골함을 안치할 수 있는 봉안단에는 유골함 20위와 위패 2위가 놓였다.

1971년 8월 23일 북한 침투작전 훈련을 받던 중 가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무장 탈영해 서울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가 숨진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46년 만에 영면에 드는 순간이었다.

국방부는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의 추모 기일인 23일 경기도 고양 육군 제11보급대대 제7지구 신축 봉안소에서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을 거행했다.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는 합동봉안식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방부는 2004년 영화 '실미도' 개봉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2005년 벽제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실미도 공작원 20명의 유해를 발굴했지만, 안치 방식 등을 두고 유가족과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들 유해는 10여년 동안 육군 제11보급대대 컨테이너 유해 보관소에 있어야 했다.

국방부와 유가족은 올해 2월에야 제11보급대대 신축 봉안소에 실미도 공작원 유해를 위한 별도의 안치소를 설치하고 이곳에 실미도 사건 설명문과 공작원 유품을 전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토대로 합동봉안식 일정이 잡혔다.

봉안식에 참석한 유가족은 뒤늦게나마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가 안치돼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

고(故) 김기정 공작원의 동생 김기태(65)씨는 "아직 한이 풀리지는 않지만, 이렇게 안치해 놓으면 관리는 제대로 될 테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인 '1·21 사태' 직후인 1968년 초 형이 "누가 나를 찾으면 모른다고 해라"는 말만 남겨두고 떠난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충북 옥천에서 참외농사를 하던 김씨 가족은 형의 행방불명으로 엉망이 됐다. 어머니는 충격에 정신을 잃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1971년 실미도 사건이 터지자 김씨는 숨진 공작원들에 형이 포함됐을 수 있다고 보고 군 당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군은 사실 확인을 해주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실미도 공작원 명단이 공개된 뒤에야 김씨는 실미도 사건의 처참한 현장에 형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군이 1·21 사태에 대응해 북한 침투작전에 투입하고자 비밀리에 모집한 실미도 공작원은 모두 31명이었다. 장교 임관이나 미군 부대 취직 등을 약속하며 건장한 민간인 젊은이들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영종도와 가까운 섬 실미도로 보내져 '인간 병기'로 거듭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실미도 공작원 7명은 훈련 중 숨졌다. 이들 가운데 4명은 탈영 시도나 '하극상' 등에 대한 처벌로 살해됐다. 부대는 비정하게도 이들이 동료 공작원의 손에 목숨을 잃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

가혹한 훈련과 인권 유린에 시달리던 실미도 공작원 24명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한 다음, 무장 탈영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했다.

청와대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교전을 벌인 끝에 버스에서 자폭했다. 이 교전으로 공작원 20명, 군인 18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이 숨졌다.

실미도 공작원들의 유해가 46년 만에 안치됐지만, 유가족의 한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과제가 적지 않다.

군·경과의 교전에서 살아남은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처형됐는데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유가족은 이날 합동봉안식에도 나와 "유해를 찾아주세요!"라고 여러 차례 외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공작원의 유해 발굴과 완전한 명예 회복을 유가족은 요구하고 있다.

국방부는 이들의 유해를 찾고자 증언을 토대로 2007∼2008년 벽제 시립묘지 일대 등을 수색했지만, 유해를 찾지 못했다.

이들 공작원 4명 가운데 2명은 이날 합동봉안식에서 유가족 동의에 따라 위패만 안치됐다.

이번에 유해가 안치된 심보길 공작원의 아들 심규범(53)씨는 합동봉안식 추모사에서 "흡족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위안으로 삼겠다"며 "보다 진전된 과거사 규명으로 명예 회복이 되면 사망자와 유가족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ljglor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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