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모던걸'은 어떻게 '못된걸'이 되었나
한민주 박사, 신간 '불량소녀들' 펴내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지난해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 문제가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혐'은 갑자기 뚝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근대 문화사를 연구해 온 한민주 박사가 1930년대 조선 경성 '모던걸'들에 대한 미디어의 시각을 분석해 펴낸 신간 '불량소녀들'(휴머니스트)에서도 일종의 '여혐'을 발견할 수 있다.
'불량소녀'는 192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용어였다. 메이지 시대 신식 머리 스타일과 양장을 한 소녀들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그러던 것이 근대 조선에서는 다른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물건을 훔쳐도, 추파를 한 번 보내도, 극장에 자주 가거나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다녀도, 저녁에 어두운 곳에서 남성과 대화만 나누어도,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아도' 모두 불량소녀가 된다. 저자는 이를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던 양가 자녀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을 우려해 사회적 감시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의 응축된 표현'이었다고 분석한다.
책은 '불량소녀'의 등장이 경성이 스펙타클한 거리로 바뀌는 것과 때를 같이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1920∼1930년대 도시화 정책 속에 경성은 시각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대로에는 화려한 네온등이 있는 백화점이 등장했다. 첨단 시설인 '승강기'를 탈 수 있고 최신 유행품들이 가득한 백화점은 서구의 일상 문물을 직접 견학할 수 있는 장소이자 문화공간, 오락공간이었다.
식민지 시대 열린 각종 박람회 역시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동물원, 식물원, 운동경기 같은 구경거리가 풍성해지면서 조선의 대중들은 거리로 나왔고 구경거리에 중독돼 갔다.
책은 이런 구경거리들을 이미지화해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전달하던 미디어가 주목한 또다른 구경거리가 바로 '불량여성'이었다고 주장하며 당시 미디어가 어떻게 여성을 바라보았는지를 다양한 자료로 보여준다.
책에 제시된 미디어 속 여성들은 대부분 '불량'하고 '꼴불견'으로 표현된다.
당시 한 신문기사는 '서울의 눈꼴틀리는 것'으로 '술취한 녀자'를 꼽는다.
"남자가 집안에서 기저귀 세탁을 하고 여자가 가두에서 자동차를 내달릴 때 새 세기(新世紀)가 올는지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것은 그때로 미루고 아직까지도 여자가 술집 문 앞에서 비틀걸음치는 것은 눈골에 알맞은 일이 못 되는 모양. 그러나 이것만은 장차 올 새 세기의 전위 행동(前衛行動)이라면 넘우나 동전 한 푼에 한 주먹씩 하는 마마콩만한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 여자의 주정은 그들의 감정이 단순한 그것만큼 표정도 단순한 까닭인지 구역이 나서 혼자 보기 아깝다."(동아일보 1929년 6월12일자)
유행을 따라 자신을 꾸미고 서구 문화를 흉내 내는 여성들은 '불량녀'나 '매소부'(매춘부) 이미지로 미디어에 등장한다. '모던걸'들은 불량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못된걸'로 불리기도 했다.
신식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헐일 없는 부인 신여성분들이 공연이 길거리로 쏘다니는 것을 보면 출 한심'하다던가 '공장에서 흘리는 한 방울 땀과 일없이 다니면서 흘리는 몇백만방울의 땀과는 비할 길이 없다','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코가 높아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라는 식의 표현으로 등장한다.
반면 이상적인 신여성상은 '얼굴에 분 한겹 더 멕는 대신 검어케 질닌 방벽에 백노지(갱지) 한 장이라도 더 바를 줄 아는 그 여성, 갑나가는 구두 대신에 동생들 양말짝이라도 하나 더 살 줄 아는 그 여성'으로 제시됐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듯한 태도도 발견된다.
당시에는 복잡한 차내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의 앞자리에 서 있다가 무릎을 부비대는 식의 성희롱 사건이 많았다고 한다. 한 잡지는 당시 한 여학생이 바늘을 이용한 호신도구로 성희롱꾼을 제압한 일을 전하며 "시골서 새로 온 여학생은 구두, 세루 옷, 팔뚝시계 같은 것만 사지 말고 이런 바늘도 더러 사두라"고 적었다. 성희롱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겉치장에 빠진 여성들이라는 의미를 비꼬아 전한 것이다.
저자는 신여성을 이처럼 비하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성들이 근대 사회의 질서와 주체가 변화하는 데서 오는 불안을 완화하고 여성들을 기존 질서에 맞게 길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미디어가 신여성들의 사치스럽고 게으른 성향만을 부각시키며 불량스런 이미지를 형성한 것 역시 신여성의 등장을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492쪽. 2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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