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적 시대를 산 사람들"…독립운동가 잠든 망우리공원
오세창·방정환 등 독립유공자 무덤 9개 있어…문화재로 등록 예고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쳐 공기는 맑고 하늘은 청명했던 지난 11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문화단체 '색동회'를 조직했던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소는 찾는 이가 없어 고요했다.
벌초를 마쳐 깔끔해진 방정환 묘역에는 특이하게도 봉분이 없었다. 그 대신 '아이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의 '동심여선'(童心如仙)과 '어린이의 동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다.
망우리공원에 관한 책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쓴 김영식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분과위원장은 "방정환 선생의 유골은 원래 홍제동 화장터에 있었으나, 1936년 후배인 최신복 등이 모금운동을 해서 이곳으로 이장했다"며 "비석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이 썼다"고 말했다.
이름난 서예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오세창(1864∼1953)은 어떤 인연으로 방정환의 비문을 작성했을까. 소파는 천도교의 교주였던 손병희(1861∼1922)의 셋째 사위였는데, 위창은 1919년 3·1 운동 당시 손병희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다.
위창이 잠든 곳 또한 망우리공원이다. 4.7㎞ 길이의 공원 산책로인 사색의 길에서 풀이 우거진 산길을 50m 정도 올라가면 오세창의 묘가 나타난다. 무덤 옆 비석은 유명한 서예가인 손재형과 김응현이 각각 앞면과 뒷면의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은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일 오세창과 방정환뿐만 아니라 민족사학자 겸 언론인이었던 문일평(1888∼1939),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오기만(1905∼1937),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한 유상규(1897∼1936), 서광조(1897∼1964), 서동일(1893∼1966), 오재영(1897∼1948) 등 망우리공원에 묻힌 독립유공자 8명의 묘역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앞서 문화재로 등록된 망우리공원의 만해 한용운(1879∼1944) 묘역을 합치면 항일 투쟁에 투신한 9명의 묘가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독립유공자 한 분, 한 분이 근대를 바라보는 창"이라며 "무덤과 비석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등록을 앞둔 독립유공자 묘 가운데는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것도 있다. 일례로 오기만의 묘는 표지판이 없어 찾기 힘들다. 게다가 무덤 앞 비석에는 그의 아버지인 오세형 가문의 묘라는 글자만 크게 새겨져 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가족묘를 쓰려고 했던 것 같다"며 "결국 오기만은 동생이 월북한 탓에 제수와 함께 묻혔다"고 설명했다.
태허 유상규의 묘는 후손이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려 했으나, 김 위원장의 설득 끝에 망우리공원에 남았다. 태허는 도산 안창호와 부자지간처럼 지냈고, 아들의 이름에 도산의 필명에 들어간 '옹'(翁) 자를 넣을 만큼 안창호를 따랐다.
도산도 "태허의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망우리공원에 함께 매장됐지만, 1970년대 정부가 도산공원을 만들면서 시신을 옮겨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나마 지난해 2월 도산의 묘비를 옮겨와 위치는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부터 40년간 묘지가 조성돼 한때는 2만8천여 기의 무덤이 있었던 망우리공원은 오늘날 8천여 기만 남아 있다. 독립유공자 외에도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시인 박인환의 무덤이 있다.
김 위원장은 "망우리공원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격동적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묻혀 있는 장소"라며 "많은 사람이 외국 여행을 가면 묘지공원에 들르는 것처럼 망우리공원을 찾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형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장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항일독립 문화유산에 대한 기초조사는 이미 완료됐다"며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집중적으로 문화재 조사와 등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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