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연대기⑦] 히잡 벗은 메블라나 후손에서 수피의 포용을 보다
이슬람 신비주의 메블라나, 끝없이 회전하는 춤으로 '신과 합일' 추구
창시자 루미, 포용·용서 가르침으로 인류스승에…본산 코니아는 터키 보수주의 중심
(코니아<터키>=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길고 폭이 넓은 흰색 치마 의상을 입은 남자들이 양팔을 들고 눈을 감은 채 빙글빙글 돈다.
음악에 맞춰 쉬지 않고 몇십 아니 몇백 바퀴를 돈 것 같은데 쓰러지는 이도 비틀거리는 이도 없다.
이는 그저 공연을 위한 전통 춤이 아니라 신과 합일을 추구하는 메블라나 종파의 의식이자 수련법인 '세마'다.
한국과 터키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학술 교류행사인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일정으로 지난달 20일 터키 코니아를 찾은 한국 대표단은 메블라나의 창시자, 메블라나 젤랄레딘 루미(1207∼1273)의 영묘가 있는 메블라나박물관 경내에서 펼쳐지는 세마 의식을 지켜봤다.
세마진(세마 수도자)의 흰색 의상은 시신을 싸는 천을, 검은 망토는 묘지 또는 죽음을 상징한다. 머리에 쓴 원통형 모자는 비석을 뜻한다.
쿠란을 낭송한 후 본격적인 춤이 시작되면 수도자들은 머리를 오른편으로 약간 기울인 채 양 팔을 어깨 위로 들어올려 음악에 맞춰 끝없이 회전한다. 수도자 각각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동시에 공연장 중심을 축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이동한다.
때때로 팔을 허리께로 내렸다가 가슴에서 잠시 교차한 후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올리며 다시 팔을 들고 회전을 계속한다.
자세히 보면 오른손 손바닥은 하늘로, 왼손 손바닥은 땅을 향하고 있다. 알라로부터 받은 은총을 민중에게 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옥색 박물관 돔을 배경으로 끝없이 회전하는 세마 수도자들은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점점 몰아의 경지로 향해 갔다. 반쯤 벌린 입으로 드나드는 들뜬 숨결이 관람객에게 느껴졌다.
'접신'의 순간, 수도자들은 발이 땅에서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신과 일체감에 도취된다고 한다.
이슬람 수피즘(신과 합일하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종교관)과 동의어로 쓰이는 메블라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 루미는 이슬람세계 최고 민중 철학자이자 대사상가요, 추앙받는 시인이다.
그는 경전 중심, 종교인 중심의 이슬람교를 무슬림 개인 중심의 종교로 확장했다.
대표적이 루미 사상으로 '오라 철학'과 용서 철학을 꼽는다.
그는 "오라, 오라. 누구든 오라. 죄를 지은 자, 불을 믿는 자, 사탄까지도 모두 오라"며 포용정신을 설파했으며, "인간은 다만 용서할 권리 밖에 없으며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오직 신의 영역이어늘"이라 가르쳤다.
이희수 교수(한양대)는 "13세기 이슬람학자의 입에서 이런 메시지가 나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면서 "이러한 가르침으로 루미는 터키 민중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랍을 제외한 이슬람은 모두 수피로 분류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덧붙였다.
유네스코는 루미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제적으로 공유하고자 2007년을 '루미의 해'로 기념했다.
이날 세마 의식에는 루미의 22대 직계 손녀인 에신 첼레비 바이루 여사가 나와 한국 대표단에게 세마가 상징하는 세계와 의식의 전과정을 설명했다.
놀랍게도 바이루 여사는 히잡을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세마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스카프로 머리칼을 가렸다.
메블라나의 본산인 코니아는 터키 전역에사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보수적인 곳으로 통한다. 거리를 지나는 여성은 대개 히잡이나 니캅을 착용한 모습이다. 메블라나 종파 여성들도 당연히 헤드스카프를 쓴다. 정치적으로는 이슬람주의 여당 '정의개발당'(AKP)의 지지기반이다.
터키 영성의 고향이라 불리는 코니아, 그것도 메블라나박물관의 경내에서 마련된 세마 의식에 참관한 루미 직계 후손이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데 이 교수 역시 적이 놀랐다고 귀띔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이유를 본인으로부터 듣지는 못했으나, 바이루 여사는 전체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루미의 추종자들이 그러한 바이루 여사를 배척하지 않고 예우하는 모습이 바로 메블라나 포용정신의 실례로 느껴졌다.
수피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슬람 수니파의 신비주의 종파, 메블라나와 동의어처럼 쓰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메블라나 이전에 수피라는 용어와 개념이 엄연히 존재했다.
김중순 교수(계명대)는 이튿날 코니아 힐튼가든인호텔에서 열린 '아나톨리아 오디세이' 라운드테이블회의에서 "수피즘은 메블라나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수련으로 신과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종교관을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수련 방법은 명상, 기도, 춤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한다.
춤 형태의 수련·의식을 채택한 수피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블라나이고, 그밖에 신비주의 이슬람 일파인 알레비 벡타시가 있다. 알레비 벡타시의 세마흐는 2010년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음주나 성행위 같은 '이단적' 수련을 하는 수피즘도 존재한다.
다양한 수피즘의 비교연구에 관한 김 교수의 발표가 끝난 후 장내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 지역 대학 부총장이 "알레비 벡타시가 어떻게 유네스코에 등재됐는지 나로서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그것이 수피즘일 수는 없다"며 격한 반응을 나타냈다.
회의장에 일순 긴장감과 당혹감이 흘렀다.
정통 수니파 무슬림은 알레비 벡타시를 이단으로 본다. 터키인 교수는 한국 대표단의 학술 발표를 교리 해석으로 받아들였다.
전날 밤 히잡을 쓰지 않은 메블라나 루미의 후손과 이튿날 학술회의에서 격앙된 터키인 교수가 일순간 대비됐다.
루미의 가르침에 마음을 쏟느라 잠시 의식하지 못했으나 이곳은 역시 코니아였다.
그러나 포용과 용서를 전파한 '메블라나의 본산'과, 터키 보수 이슬람의 요람은 같은 도시다. 자유로운 모습의 루미 후손과 교리에 충실한 학자는 모두 코니아 사람이다.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 터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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