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하늘을 나는 독립군 장군' 홍범도
(우슈토베<카자흐스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937년 소련 연해주에 모여 살던 고려인들은 직간접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몸담았거나 이들의 친인척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 정부는 그해 9월 9일부터 이들을 시베리아횡단열차로 실어 나르기 직전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천500여 명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이들은 대부분 이름없는 민초였지만 우뚝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항일무장투쟁사 가운데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홍범도였다. 소련 최고지도자 레닌의 칭송을 받은 그도 스탈린 치하에선 유배 아닌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홍범도는 여러모로 김좌진과 대비된다. 부유한 명문가 자제였던 김좌진과 달리 홍범도는 머슴 출신이었다. 홍범도는 1921년 독립군끼리 살육전을 벌여 수천 명이 희생된 '자유시 참변'에서 볼셰비키의 지원을 업고 공격에 나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편을 들고 소련군 제5군단 소속 합동민족여단의 대대장으로도 활동한 반면 김좌진은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주의 노선을 고수하다 조선공산당원에게 살해됐다.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기 최대 대첩으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가 두 사람의 연합작전으로 이뤄진 것인데도 남한에서는 김좌진만 부각하고 북한은 아예 홍범도의 단독작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필사본만 전하는 '홍범도 일지'에 따르면 그는 1868년 평안도 평양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작은아버지 집에 살다가 다른 집 머슴살이도 했다. 15살 때 평안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군대의 비리를 목격하고 병영을 뛰처나온 뒤 제지공장 노동자와 금강산 신계사 승려를 거쳐 산짐승을 잡는 포수 노릇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이듬해 을미사변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그는 1895년 11월 강원도에서 포수와 빈농 40여 명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꾸렸다. 1904년 가을에는 함경도 북청의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했고, 1907년과 1908년에는 함경도 일대에서 수십 차례 게릴라전을 벌여 일본 군경을 무찔렀다. 당시 함경도에는 "홍대장 가는 길에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엔 비가 내린다"란 노랫말의 '날으는(나는) 홍범도가'가 유행했다.
홍범도는 1908년 11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고 1910년 6월 우수리스크에서 결성된 13도의군에 참여했다. 일제는 홍범도를 체포하려고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가 그가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가족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1919년 5월 대한독립군을 창설한 뒤 8월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이름을 떨쳤다.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벌인 최초의 전투였다. 이후로도 혁혁한 전공을 올려 기세가 하늘을 찔렀으나 병참과 무기 부족에 시달리는 고민을 해결하고자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에는 일본군 19사단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가 157명이나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310명을 사살한 것으로 적혀 있다. 독립군 사망자는 4명에 불과했다.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무찌른 것이 청산리 전투다. 독립군도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일본군은 2천여 명이 전사하고 1천여 명이 부상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1921년 1월 만주에서 다시 연해주로 옮겨간 홍범도는 그해 6월 '자유시 참변' 때 이르쿠츠크파 편에 섰다가 소련군의 일원이 됐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초청받아 레닌을 접견하고 레닌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금화 100루블, '조선군 대장'이라고 쓴 레닌 친필 증명서 등을 받았다.
홍범도는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중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극장도 함께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홍범도는 밤에는 고려극장 수위,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꼿꼿한 기개는 여전해 1941년 독소전쟁이 터지자 73살의 고령임에도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며 현역으로 참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그도 세월은 이기지 못해 1943년 10월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2년에 와서야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 뒤로도 한동안 외면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소련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레닌의 선물까지 받은 인물이 높이 평가될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공적을 가릴 수 있다고 여겨서인지 홍범도 현양에 나서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지난해 4월 진수한 1천800t급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인 잠수함 이름으로는 안중근·김좌진·윤봉길·유관순에 이어 5번째다.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자취나 숨결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크질오르다에는 1994년 고려인들의 청원으로 '홍범도 거리'가 생겼다. 길 입구에는 그의 초상화와 이름을 새긴 동판이 붙어 있으나 그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현지인은 드물다고 한다. 그의 유해를 안장하고 동상과 기념비를 세운 묘역도 찾는 이가 드물어 잡초가 우거져 있다. 당시 크질오르다에 있던 고려극장은 1942년 태장춘이 홍범도 일대기를 연극으로 꾸민 '홍범도'를 그가 보는 앞에서 공연했다. 서거 70주년인 2013년에는 알마티로 자리를 옮긴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극장이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와 '카자흐 고려인 독립유공자후손회'(회장 계 니콜라이)가 참가한 가운데 71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수난의 길을 되짚어가고 있는 '극동시베리아 오디세이 회상열차' 탐사단은 2일 오후 고려극장에서 현지 고려인 단체와 함께 홍범도 장군 추모제와 고려인 문화예술제를 연다. 뒤늦게나마 홍범도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늘고 있지만 생전의 명성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의 묘역 입구에는 한글로 '통일의 문'이라고 쓰여 있다.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홍범도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되고 생애가 조명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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