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 연대기④] 중국을 떨게 한 고구려·돌궐 연대
"공동의 적에 맞서려 2천년 전에도 협력"
"고구려 등자·사면비 튀르크에 전수"
(코니아·초룸<터키>=연합뉴스) 하채림 특파원 = 한국과 터키는 '피로 맺은 형제의 나라'라고들 한다.
터키군은 6·25전쟁 기간 4차에 걸쳐 2만2천6명을 파병했는데, 그 가운데 724명이 전사하고 166명이 실종됐다. 파병 규모로는 유엔군 가운데 네번째이고, 전사자는 두번째이니 피로 맺은 형제라는 말에 지나침이 없다.
역사학자들은 양국간 인연의 뿌리는 2천년 전까지 뻗어 있으며, 교류도 활발했다고 추측한다.
터키인의 조상 돌궐(突厥, 튀르크의 한자 음차 표기)은 약 1천400년 전 한국인을 대거 받아들였다.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는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유민이 당나라와 돌궐 등에 유입됐다고 기록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수 양제는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왕의 막사를 찾았다가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두 나라가 손을 잡는다면 강대국 수나라도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경험은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는 계기가 된다.
8세기 제작된 돌궐 장군 쿨테긴(Kul tegin)의 비석에는 6세기 돌궐 제1제국 왕의 장례식에 동쪽에 있는 '매크리'(무크리, 배크리)에서 사신이 왔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매크리는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통용된 고구려의 명칭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과 흉노 사이에도 연대와 교류가 있었다는 내용이 문헌으로 남아 있다.
한나라 역사서 한서에는 무제가 고조선과 흉노의 결탁을 막으려 고조선을 침략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 부르며 두 나라의 협력을 경계했다. 흉노를 계승한 후예가 돌궐이다.
최근 몇 년 새 중국이나 돌궐의 문헌 외에 두 나라의 교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 연구 결과들도 공개됐다.
한·터 문화·학술 교류행사인 '아나톨리아 오디세이'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우석대)는 이달 21일 터키 중부 코니아에서 고구려 특유의 사면비가 시차를 두고 돌궐에서도 나타났다는 연구 내용을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비석은 납작한 비의 앞뒷면에 글을 새기는 형태인데 비해 5세기 고구려에서는 4면 모두가 사용되는 독특한 비석이 제작됐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대표적이다.
고구려 특유의 4면비는 제2돌궐제국에서도 나타난다. 돌궐의 비석은 6세기까지 중국 비석과 같은 2면 형태였지만 8세기초부터 4면비 형태로 바뀐다.
이 시기 고구려가 무너지고 그 유민이 당과 돌궐 등에 흩어졌다.
조 교수는 668년 고구려 붕괴 이후 사면비 문화가 유민을 통해 돌궐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상정했다.
고구려와 튀르크의 교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유물은 기마병이 사용하는 등자다.
고구려 개마(鎧馬)무사의 능력을 배가시킨 등자는 5세기에 '유연'으로, 이어 튀르크로 전파됐다.
강인욱 교수(경희대)는 터키 중북부 초룸에서 열린 라운드테이블회의에서 "등자를 비롯해 고구려의 발달된 무기가 튀르크의 발달을 촉진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두 나라는 주변 강대국에 맞서기 위해 흉노 시대 때부터 서로 협력하는 사이였다"고 분석했다.
한국과 터키가 손잡고 공동의 적에 맞선 역사는 57년 전 6·25전쟁만이 아니라 2천년 전 고조선·흉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강 교수는 설명했다.
조 교수는 "고조선과 흉노, 고구려와 돌궐의 협력관계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21세기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면서 "동북아의 위기를 막고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한국은 역사 속 두 나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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