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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⑨ 독립운동사의 빈칸 고려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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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⑨ 독립운동사의 빈칸 고려공산당

1921년 이르쿠츠크서 창당, '자유시 참변' 계기 세력 약화돼

당시 흔적도 거의 지워져…"이념 떠나 열정·헌신 잊지 말아야"

(이르쿠츠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 탐사단이 27일 오후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내린 곳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이르쿠츠크였다.

탐사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3박4일 동안 비좁은 열차 안에서 지내느라 지친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시내 답사에 나서 주요 명소를 둘러보고 애국선열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항일운동 유적을 찾았다.

이르쿠츠크는 1920년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그해 9월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로 개칭)가 결성된 데 이어 이듬해 고려공산당이 창당된 곳이다.

탐사단원들은 이날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가 결성된 이르쿠츠크 국립사범대 도서관 앞에서 이창주 회상열차 집행위원장(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28일 오전에는 1921년 고려공산당이 창당된 밤필로프극장을 답사한다.


◇ 러시아혁명 발발하자 볼셰비키와 연대 모색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연해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운동 진영은 혁명 주체 세력인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가 약소민족 해방의 기치를 내건 데다 일본이 다른 열강과 함께 혁명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1918년 3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조선혁명가대회가 열렸다.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 민족주의자, 이동휘·유동열 등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등이 한자리에 모여 볼셰비키와 손을 잡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동녕과 양기탁 등 구 신민회 간부들이 반대하자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1918년 5월 18일 별도 모임을 열고 한인 사회주의 정당 창당을 결의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탄생한 것이다. 중앙위원장으로는 이상설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이동휘가 뽑혔다.

이동휘는 구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정통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창당의 산파역을 맡은 인물은 김알렉산드라였다. 1916년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볼셰비키 당원이 된 그녀는 당시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였다.

한인사회당은 산하에 조직부·선전부·군사부 등 집행부를 두고 교과서와 기관지를 발간했다. 군사조직인 한인적위대는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해 그해 8월 백군(白軍)의 일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는 국권 상실 후 러시아 한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하바롭스크가 백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한인사회당은 아무르주(흑룡주)로 옮겨갔다. 김알렉산드라는 백군에 맞서 싸우다 체포돼 33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동휘는 1919년 11월 3일 상하이(上海)에서 통합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뒤 한인사회당 본부를 상하이로 옮기고 하바롭스크에는 지부를 두었다.

이듬해 1월 적군이 이르쿠츠크를 점령하자 적군에 소속된 수십 명의 한국인이 1월 22일 오하묵·김철훈 등을 중심으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했다. 다른 지역의 한인 공산주의자들도 이르쿠츠크로 모여들어 규모가 커지자 1920년 9월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로써 러시아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상하이에 본부로 둔 한인사회당 지부(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중앙총회(이르쿠츠크파)로 양분됐다. 상하이파의 수장 이동휘는 이승만과 갈등을 빚다가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


◇ 자유시 참변으로 러시아 독립운동 진영 와해

그 무렵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은 이르쿠츠크에 동양비서부를 설치하고 초대 부장에 보리스 슈미야츠키를 임명했다. 슈미야츠키가 볼셰비키 당원들이 포함된 이르쿠츠크파를 노골적으로 지원하자 상하이파는 힘을 잃고 이르쿠츠크파가 득세했다.

이르쿠츠크파는 유리해진 국면을 이용해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동휘도 며칠 뒤 상하이에서 같은 이름의 고려공산당 창당대회를 열고 위원장이 됐다.

두 파는 이름만 같을 뿐 인물 구성이나 노선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상하이파는 지지층이 두터운 데 비해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두 세력은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가 이르쿠츠크파와 적군이 상하이파를 공격해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1921년 6월 28일 일어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다.

적군은 1920년 아무르주의 알렉세예프스크를 점령하고 백군 치하에서 해방했다는 의미로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드니로 개칭했다. 한인들은 이를 번역해 자유시라고 불렀다.

이 참극으로 러시아의 독립운동 세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책임 소재를 따지는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도 힘을 잃었다. 1922년 10월 두 파를 아우른 고려공산당 연합대회가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렸는데, 이동휘를 비롯한 상하이파가 전권을 장악하자 이르쿠츠크파는 중도에 대회장을 벗어나 이르쿠츠크 동쪽 치타로 철수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통합 고려공산당을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선포하자 이제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동휘가 정통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극동부 산하에 '꼬르뷰로'(고려국)를 설치해 원격 통치에 들어갔다. 이동휘는 코민테른 극동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4인 위원 중의 한 명으로 전락했다. 1923년 1월부터는 코민테른 꼬르뷰로가 한국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전반을 직접 지휘해 자생적으로 발전해온 해외 한인 사회주의운동도 종말을 고했다.


◇ 김알렉산드라 2009년 뒤늦게 훈장 받아

고려공산당을 세운 이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지속돼온 이념 대결의 희생양이 돼 잊힌 인물이 됐고 고려공산당은 독립운동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비교적 사정이 나았다. 김알렉산드라도 2009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나 오하묵·김철훈 등 이르쿠츠크파들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공적을 찬양하느라 고려공산당 주역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도 이들을 외면해 현재 이르쿠츠크에는 당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창주 위원장은 "민간 차원에서 고려공산당 유적지에 표지판 설치를 추진했는데 러시아 당국의 반대로 무산됐다"면서 "이념을 떠나 광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우국지사들의 열정과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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