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법원 "의학적 증거 부족해도 백신이 질병 초래 판결 가능"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의학적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여러 정황증거가 뒷받침될 경우엔 법원이 예방접종 때문에 질병이 생겼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유럽연합(EU) 최고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ECJ)는 21일(현지시간) B형간염 예방 백신을 맞은 프랑스인 J.W.씨가 백신 제조업체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이같이 판결했다.
J.W.씨는 1998~1999년 B형간염 예방주사를 맞은 얼마 뒤부터 몸의 여러 곳이 불편해져 진료를 받다 접종 1년 만에 다발성 경화증(MS)으로 진단받았다.
MS는 면역체계가 뇌와 척수 등 중추신경계를 산발적으로 공격해 발생하는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으로 평형, 운동, 시력, 언어, 감각, 성 기능, 배뇨, 배변 장애 등이 주요 증상으로 나타난다.
J.W. 씨와 가족은 B형간염 예방주사 때문에 이 질병에 걸렸다면서 2006년 백신 제조사 사노피 파스퇴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프랑스 법원에 제기했다.
법원이 "예방접종과 MS 발병 간 인과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없고, 인과관계를 뒷받침할 과학적 합의도 없다"며 기각하자 J.W. 씨는 상고했다. 재판이 진행되던 2011년 J.W. 씨는 사망했다.
프랑스 대법원(파기법원)은 법원이 채택할 수 있는 증거 요건을 비롯해 이 재판의 쟁점과 관련한 의견을 듣기 위해 ECJ에 판정을 의뢰했다.
ECJ는 21일 판결에서 "백신이 MS 발병의 원인이라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의학적 증거는 없지만 다른 '구체적이고, 일관된 증거들'이 있다면 백신 결함 여부를 법원이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ECJ는 "예방접종과 질병 발병 사이의 시기적 근접성, 피해자가 그 이전엔 매우 건강했던 점, MS 발병 가족력이 없는 점, 나중에 B형간염 백신을 맞은 사람 중 MS 발병 사례가 여럿 있는 점" 등을 '구체적이고 일관된 증거'로 들었다
ECJ는 이른바 의학적 또는 과학적 증거 외에 다른 증거들은 일체 배제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입증책임을 과도하게 부담지우는 일이자, 현대 기술을 이용한 제품 특성을 도외시하고, 법원 기능과 목적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프랑스) 법원이 의학적 증거 외에 이런 충분한 (정황)증거들을 검토, 손해배상 판결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CJ의 이번 판결은 J.W.씨 사건에 대한 직접적 판결은 아니고 일종의 유권해석이지만 프랑스 대법원 등 EU 내 각급 법원이 유사 사건을 다룰 때 일종의 지침이 된다.
한편, 사노피 파스퇴르는 성명에서 "우리 백신은 각국 당국 승인을 받아 30여년 동안 판매한 것이며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내성이 좋은 약"이라고만 밝혔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일부 백신 전문가들은 이 판결이 과학적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며 "땅콩버터를 먹은 뒤 백혈병이 나타나면 버터와 그 제조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향후 유사 소송이 줄을 잇고, 무엇보다 일부 단체의 백신 접종 거부 운동에 힘을 실어줄 것을 우려했다.
반면, 환자보호단체들은 백신 등 의약품의 특성상 부작용이 확실하게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개인들이 '확립된 의학적 근거'를 들어 제약회사의 책임을 입증하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한 것이라며 판결을 환영했다.
choib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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