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처우개선 시급" 특벌법·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청원
19세 이상 동포 4세의 합법적 체류 보장이 핵심…1천여명 거주
"성인 되어서도 가족과 살고 싶어요"…靑 수석 "적극적 검토"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저는 어려서부터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어머니를 따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여기저기를 떠돌았습니다. 4년 전 한국에 와 이제야 비로소 우리 가족이 살 곳을 찾았다고 기뻐했는데 내년이 지나면 또 떠나야 합니다. 성인이 되면 저는 체류신분이 없어진다네요. 부모가 다 여기 있는데 저 혼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두렵고 막막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게 해주세요."
9일 오후 서울·안산·광주 등 전국의 고려인지원단체 대표들과 고려인 30명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설치된 '광화문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앞마당에 모여들었다. 국내 체류 고려인의 처우 개선을 위한 고려인특별법과 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을 촉구하는 청원을 위해서다.
청원서 제출에 앞서 앳된 얼굴의 고려인 4세 김 율랴(고1) 양은 '대한민국의 어른들에게'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했다. 국내체류 자격인 재외동포비자(F4)가 동포 3세까지로 한정한 재외동포법 시행령 때문에 그는 가족 동반 비자로 한국에 머물고 있다. 2019년에 만 19세로 성인이 되면 그마저 해당이 안 돼 체류 자격이 상실된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추방될 처지인 셈이다.
4만∼4만5천 명으로 추정되는 국내 고려인 가운데 동포 4세에 해당하는 자녀들은 대략 1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강제이주 80년 기억과 동행 위원회의 김종현 사무국장은 "1937년 갑자기 터전을 잃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이주 됐고,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되찾았을 때는 존재마저 외면됐고,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로 또 이산의 길로 떠밀렸을 때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며 "80년을 떠돌았는데 2017년 모국에서 가족이 생이별해야 한다면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소문은 3명이 낭독했다. 김 율랴에 이어 두 번째로 나선 고려인 3세 박 비탈리 씨는 "몸을 써야 하는 일용직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고려인은 입국해 90일은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데 이때 다쳐서 중환자실에 있는 형의 병원비로 가족이 고통받고 있다"며 "몇 년째 일용직을 전전하는 누나도 월 10만 원의 보험료가 부담돼 건강보험에 못 들고 있다. 아파도 참고 살아야 하는 처지를 헤아려서 모국이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마지막 호소문을 읽은 고려인 3세 노 알렉산드르 씨는 한국 생활 10년째이지만 기러기 아빠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의 소박한 꿈은 카자흐스탄에서 일시 방문으로 왔다 가는 4살배기 딸과 부인이 한국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부인과 딸의 손을 꼭 잡은 박 씨는 "동포도 아니고 다문화에도 해당 안 돼 다 보니 보육지원도 의료보험도 못 받는 건 둘째치고 가족이 모여 살 수도 없다는 게 너무 속상하다"며 "고려인이 모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장벽을 없애달라"고 말했다.
이들은 낭독을 모두 마친 후 하승창 대통령비서실 사회혁신수석에게 청원서를 전달했고, 하 수석은 "여러분의 호소가 무엇인지 잘 알겠다. 청원서를 잘 살펴 해당 부처에 보내 적극적으로 검토해 답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고려인특별법 개정 단장을 맡은 안산시 원곡법률사무소의 서치원 변호사는 "성인이 된 고려인 4세의 추방을 막는 길은 시행령 개정인데 이는 국회 동의 없이 정부 의지만 있으면 바로 고칠 수 있다"며 "개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원망을 안고 모국을 등져야 할 동포들만 늘어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국민 청원을 접수하러 자리를 뜨는 하 수석 앞으로 달려간 김 율랴 양은 학교의 한국인 친구들이 쓴 호소문을 모아온 것이라며 편지 봉투를 건넸다. 무슨 내용이냐는 질문에 그는 "단짝 친구를 잃고 싶지 않으니 제발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친구들이 적었다. 모국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해준 고마운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는 내달 12일까지 청원을 접수한다. 모든 청원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8월 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보고를 통해 할 예정이다.
청원을 마친 고려인들은 "민족이 존속하기 위한 제일 중요한 요소는 영속성인데 3세대까지는 동포이고 4세대부터는 아니라는 규정은 결국 민족을 단절시키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번 정부에서만큼은 우리가 이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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