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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넥타이부대'주역들 "마음속 부채의식에 거리로 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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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넥타이부대'주역들 "마음속 부채의식에 거리로 나갔죠"

빚이었다"제2금융권 노조 간부였던 김국진·정일영·이상재·송해주씨

4·13 호헌 반대성명 마련…직장인들 거리 나온 계기 만들어

(서울=연합뉴스) 현혜란 최평천 기자 = 1987년 6월. 부모를 모시고, 아들딸을 먹여 살릴 돈을 벌러 날마다 출근하던 이들이 직장이 아닌 거리로 뛰쳐나왔다.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는 그들에게 '전투복'과 같았다.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앞둔 8일 연합뉴스가 만난 김국진(66)·정일영(62)·이상재(61)·송해주(59)씨. 나이도, 출신 대학도, 고향도 제각각인 이들을 하나로 묶는 단어는 바로 '넥타이부대'다.







이들은 당시 제2금융권 노동조합에 몸담으면서 4·13 호헌조치 반대성명의 기틀을 마련해 직장인들을 거리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 주역들로 알려졌다.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을 틈타 시위에도 합류했다. 경찰은 넥타이를 매고 인도에 있는 직장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덕분에 이들은 경찰이 시위대를 과격진압하려 할 때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당시 김국진씨는 대한보증보험 노동조합 위원장, 정일영씨는 한일투자금융 노조위원장, 이상재씨와 송해주씨는 범한화재해상 노조에서 각각 교선부장과 쟁의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은 인터뷰 내내 서로 공을 돌리느라 분주했다. 운이 따랐던 것이었다며 자기 역할을 낮추는 등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씨는 정씨에게 "그 당시 금융권에 너 같은 놈이 없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정씨는 "무슨 소리야. 모두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라며 쑥스럽다는 투로 되받았다.

김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1987년 서머타임(일광절약 시간제)이 시행돼 오후 5시 퇴근해도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넥타이부대가 시위에 합류하기 좋았다"며 "모든 것이 항쟁을 돕는 듯 운이 따랐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때 이들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생계유지의 막중한 의무가 아들, 남편, 아버지에게 집중되던 1980년대에 그들을 거리로 이끈 원동력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부채의식'이었다.

"80년대 대학교 벤치는 비밀경찰의 자리였어요. 학교 안에서 시위하면 잡혀가는 데 5분도 안 걸렸죠. 기습시위를 하다가 학생들이 질질 끌려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그때 잡혀간 사람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취직도 어려웠지요. 그런 시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마음의 빚이었다고 할까요." (정일영)




이들 중 일부는 금융권에서 10명 남짓한 규모로 운영하던 스터디그룹에도 속해 있었다. 한국노총이 협의도 없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이들은 스터디그룹에 모여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브레인스토밍'으로 반대 성명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넥타이부대를 거리로 나오게 한 기폭제는 5평 남짓한 구로동 자취방에서 이렇게 탄생했다.

아쉬웠던 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막힘 없는 대답이 나왔다. 6·10 항쟁에서 피와 땀으로 얻어낸 성과가 절차적 민주주의 확보에 그쳤다는 점이다.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하지 않고 모두 대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결국 대통령 자리는 신군부 출신 여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그때 돌아가지 말고 남아서 더 싸웠어야 했나 싶어요. 우리가 원하던 민주정부는 세워지지 않았으니까. 그게 이번 촛불집회랑 우리랑 다른 점이죠. 우리는 미완성이었지만 이번에는 완성했잖아요."(이상재)

이들에게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광화문 광장을 밝힌 촛불집회가 울리는 반향이 남다른 이유다. 같으면서도, 또 다른 모습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고 세 사람은 입을 모았다.

"6월항쟁 때 우리가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였는데, 그 근간을 흔든 국정농단 사태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촛불집회를 보면서 6월 항쟁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피 흘려 지킨 민주주의가 위험해 처했을 때 국민이 또다시 나서서 민주주의를 지켜냈어요."(김국진)

"그때는 지도부가 이끌어가는 형태였지만, 이번에 퇴진행동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만약 퇴진행동이 지도부 행세를 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민들의 생각이 더 앞서 있었으니까. 아주 절제된 모습이었잖습니까."(이상재)

"1987년하고 2017년은 천양지차죠. 거리에 나온 모든 시민이 통신장비부터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데 어떻게 경찰이 시민을 건드리겠어요? 그야말로 경찰이 시민들에게 포위된 셈이지요."(송해주)

정일영씨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뛰어난 시민의식을 치켜세우면서도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10 항쟁이 없었으면 2017년의 촛불도 없었을 거야…"라며 30년 전이 떠오르는 듯 말끝을 흐렸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run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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