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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추진한 왕권강화 정책, 19세기 세도정치로 이어져"

신간 '정조와 정조 이후'서 오수창 서울대 교수 주장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1752∼1800)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정치를 펼쳤고, 서얼 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하지만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둘째아들인 순조(1790∼1834)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소수의 권세가가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이후 조선의 왕은 누구도 정조처럼 강력한 왕권을 얻지 못했다.

정조와 정조 이후의 정치 양상이 이처럼 극명하게 달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간 '정조와 정조 이후'(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오수창 서울대 교수는 "김조순이 확립한 권력 독점의 세도정치는 탕평정치의 한계가 구조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탕평정치와 세도정치는 분절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고자 다양한 당파의 사람을 등용하는 탕평정치는 기본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정조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재상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지방의 유림 세력인 산림(山林)의 정치 참여를 막았다. 또 당하관(정3품 이하)의 공론을 대표하던 관직이 갖고 있던 후임자 선발 역할을 축소했다.

오 교수는 "정조는 감찰과 간쟁 업무를 맡는 청직 중심 체제를 해체하고 대신권과 왕권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권력구조를 수립했다"며 "이러한 정책은 붕당을 깨뜨린다는 기조 위에서 추진됐으며, 삼사의 언론 활동이 매우 침체되는 폐단이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정조가 절대적 군주권을 지향했다는 점은 각종 시험 문제를 본인이 직접 출제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재위 기간에 연평균 58.6편의 문제를 냈고, 재위 후반기인 1789년부터는 매년 80∼90편을 출제했다.

오 교수는 이렇게 강력해진 왕권을 왕이 아닌 왕의 측근이 물려받으면서 세도정치가 생겨났다고 분석한다. 그는 "정조가 일관되게 추진한 재상권 강화는 고위 관원에게 권한을 집중시켜 높고 낮은 관인이 서로 견제하는 전통을 변화시켰다"며 "권세가들이 고위 관원과 권력을 독점하던 구조는 정조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의 재상권 강화 정책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오 교수는 이어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치밀하게 이끌었던 정조의 정치는 자신과 같거나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을 지닌 군주에 의해서만 지속할 수 있었다"며 "정조 정치의 역사적 성격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군주마저도 통치체제와 사회구조에서 후대로 계승될 새로운 틀을 수립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책에는 지난해 계간지 '역사비평'에 연재됐던 논문 8편이 실렸다. 정조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글도 있고,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심화한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분석한 논문도 수록됐다. 288쪽. 1만5천원.


psh59@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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