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일해도 '나가' 한마디에…"마필관리사는 파리 목숨"
노조 "불합리한 고용구조 고쳐야"…마사회 "적정 임금받도록 지도"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10년 넘게 일한 직원인데 '너 나가' 한마디에 파리 목숨이더라고요."
2년 전 한국마사회 부산·경남 경마장의 한 마방에서 마필관리사 팀장으로 일하던 A씨가 조교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았다.
조교사가 자신의 친척을 마필관리사로 고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양정찬 마필관리사노조 부산경남지부장은 "친척을 팀장에 앉히려고 10년 넘게 신망받으며 일했던 분을 온갖 핑계를 대며 쫓아냈다"면서 "파리 목숨 취급받는 마필 관리사의 고용형태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말을 경주마로 키워내는 훈련을 담당하는 마필관리사는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경마장내 각 마방에 소속돼 있다.
마방은 프로야구로 치면 각 구단으로 경마장별로 30여개의 마방이 있다.
마방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조교사다. 흔히 구단의 감독으로 비유된다. 마주들로부터 말을 위탁받아 수익을 내는 개인사업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수도권 경마장과 지역 경마장의 마필관리사 고용 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수도권 지역은 조교사 협회 차원에서 마필관리사를 고용하고 관리하지만 부산·경남과 제주 경마장은 조교사 개인이 마필관리사를 고용한다.
양 지부장은 "마사회가 수도권 경마장보다 설립이 늦은 지방 경마장에 성과주의 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며 마필관리사의 고용 형태나 임금 배분 구조를 착취가 가능한 형태로 바꿨다"면서 "툭하면 초과 근무와 당직 근무에 임금도 제대로 못 받지만 조교사에게 항의할 수조차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수도권 경마장의 마필관리사 임금은 기본급과 성과급 비율이 9대 1이다. 성과에 따라 차등은 있지만 비교적 안정적으로 돈이 지급된다.
하지만 부산·경남, 제주 경마장의 마필관리사는 성과급 비중이 40%나 된다. 기본급이 200만원도 안되는 상황에서 성과에 따라 들쭉날쭉한 임금은 매우 불안한 요소다.
지역의 마필관리사들은 수도권 마필관리사들처럼 우승 상금의 일정 부분을 보장받지도 못한다. 수익은 조교사가 모두 재량으로 나눠줄 수 있도록 임금 구조가 만들어졌다.
양 지부장은 "마사회는 이런 착취구조를 너무 잘 알면서도 조교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고 설명했다.
노조는 지난 27일 부산·경남 경마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진 마필관리사 박모(38) 씨의 사망 사건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며 29일 한국마사회 부산 동구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 지부장은 "박씨가 (숨지기 전날) 관리하는 말이 경주하던 중 앞발을 드는 바람에 성적이 떨어지자 조교사가 박씨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의 욕설을 했다"면서 "평소 마필관리사 처우 개선에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내던 박씨가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5년간 노조 대의원으로 활동해왔다.
지난 2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중앙선거대책위 직능본부 말산업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다.
박씨는 숨지기 열흘 전 은수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무실에 노조 탄압 관련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전화를 한 사실도 알려졌다.
은 전 의원은 "사무실로 전화가 왔는데 직접 통화하지는 못했다"면서 "이후 노조를 통해 파악한 바로는 박씨가 노조 탄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노조는 지난해부터 노조 탄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양 지부장은 "지난해 노조비를 납부하는 노조원의 명단이 유출되면서 개별 노조원들이 탈퇴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면서 "1년사이 노조원 250명 중 60명만 남았는데 조직적인 압박 없이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씨가 숨지기 전 아내와 통화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겠다. 견디기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내용의 블랙박스 녹취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유서에 직장에 대한 욕설을 쓴 것으로도 알려졌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직장 내 강압 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할 계획"이라면서 "하지만 박씨가 가정 문제로도 힘겨워했다는 진술이 많았던 만큼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사망 동기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마사회는 이날 해명자료에서 "마필관리사들이 동물원 사육사나 말 사육사 등 유사직종보다 임금이 높은 상황"이라면서 "마사회에서는 마필 관리사들이 적정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교사를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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