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구하기' 음모론 재생산에 주류매체 "가짜뉴스" 강력제동
극우파 "러시아 해커가 아닌 민주당원이 이메일 유출해 보복 살해당해" 주장
발언 당사자의 철회로 거짓 드러났지만, 확산 시도…"도덕적 파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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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미국의 폭스뉴스 등 극우성향 매체와 정치인 등이 이미 거짓으로 판명 난 음모론을 재생산, 러시아의 미국 대통령선거 개입연루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구하기에 나서자 워싱턴 포스트 등 주류 언론들이 이를 '가짜뉴스'라고 명확히 규정하며 이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히 반격하는 모습이다.
'가짜뉴스 생태계'(워싱턴 포스트), '거꾸로 미디어'(버즈피드) 등으로 꼬집으면서 극우 매체들이 명백히 사실이 아닌 주장들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무시하거나 방관하지 않겠다는 적극적 대응 기조로 보인다.
그동안 가짜뉴스 대응 방법을 놓고 고민해온 결과이자, 지난 프랑스 대통령선거 때 해킹 세력에 의한 선거 개입 시도가 있자 프랑스 주류 언론들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자제하는 '능동적' 대처를 통해 선거를 '보호'한 것에서도 교훈을 얻은 것으로 짐작된다.
극우 세력이 트럼프 구하기에 동원한 음모론은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직원인 세스 리치(27)가 지난해 민주당 내부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이메일 수만 건을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넘겨줬다가 보복 살해당했다'는 것을 줄거리로 한다.
이 음모론대로라면, DNC 메일 유출은 러시아 해커들의 소행이 아니므로 트럼프 대통령이나 그 측근들이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은 힘을 잃게 된다.
모든 음모론이 그렇듯 아주 일부분은 사실이다. 리치가 지난해 7월 10일 밤 걸어서 귀가하던 도중 여러 차례 총격을 받아 숨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워싱턴 D.C. 경찰은 정치적 동기와 전혀 상관없이 총기 강도가 금품을 강탈하려다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고, 리치의 가족도 이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피살 당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이메일 유출에 리치의 역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범인에 관한 정보 제공에 2만 달러(2천200만 원)의 현상금을 거는 바람에 정치적 음모론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 음모론은 트위터에선 여러 변종을 낳으며 돌아다녔으나 대체로 숙져있다가 이달 들어 폭스뉴스의 워싱턴 D.C 지역 계열사 폭스5와 폭스뉴스, 뉴트 깅그리치(공화) 전 하원의장 등이 다시 불러내는 바람에 확산하고 있다.
지난 15일 폭스5가 폭스뉴스의 법률 분야 고정 논평가 로드 휠러의 말을 인용해 '독점'이라며 세스 리치의 죽음과 위키리크스 간 연관성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휠러는 리치 가족이 고용한 사설탐정으로 소개됐다.
이에 NBC 뉴스, CNN,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주류 언론들이 바로 확인에 들어가 휠러의 주장이 사실무근임임을 신속하게 밝혀냈다. 휠러는 리치 가족으로부터 돈을 받고 고용된 게 아니라 한 텍사스 기업인이 자신이 돈을 대겠다며 사설탐정으로 쓰라고 권유한 인물로 밝혀졌다.
당초 연방수사국(FBI)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던 휠러는 CNN 기자에게 사실은 다른 폭스뉴스 기자한테서 들은 것을 말한 것이라고 실토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20일 전했다.
폭스5가 인용한 근거는 휠러의 말뿐인데 휠러는 기자한테 들은 얘기를 되풀이했을 뿐이다. 결국, 폭스5는 관련 보도에 '편집자 주의문'을 붙여 휠러가 'FBI 소식통'이라는 자신의 당초 말을 철회했다고 밝혀야 했다고 ABC 방송은 22일(현지시간) 전했다. 리치 살해 사건 수사는 온전히 경찰 몫으로, FBI는 관여하지도 않았다.
폭스5에 이어 폭스뉴스 황금시간대 진행자 숀 해너티도 지난주 3차례 걸쳐 음모론을 다뤘다. 휠러는 여기서도 증거는 없다고 물러섰으며, 다른 등장인물인 정치평론가 러시 림보는 리치의 랩톱 컴퓨터에 위키리크스로 유출된 이메일 4만4천 건이 보관돼 있으나 봉인됐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역시 사실무근이다.
그런데도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지난 21일 폭스뉴스에 출연, DNC 이메일은 러시아가 아니라 리치가 유출했으며 그로 인해 정치적 암살을 당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으나 증거는 내놓지 못했다. 극우파 일부는 트럼프가 리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명령할 것도 요구하고 있다.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맥스 부트 미국외교협회(CFR) 국가안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2일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폭스뉴스가 발족할 때 만 해도 자신과 주변의 보수주의자들은 "주요 신문방송들이 쏟아내는 진보 논조에 이념적 균형을 잡아줄 매체라고 응원"했으나 "트럼프의 진짜 스캔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리치의 가짜 스캔들을 팔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도덕적 파산" 상태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왕년의 빨갱이 사냥꾼 리처드 닉슨 곁에서 정치에 입문했던 폭스뉴스 설립자 로저 에일스가 세운 뉴스전문 방송이 사실상 러시아의 정보전쟁 무기로 봉사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을 개탄하며 "미국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가들보다 보수주의 이상에 충실한 격조 있는 보수주의 TV 방송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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