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힘·가식 없는 표현…건재 과시한 베레좁스키
베레좁스키 피아노 리사이틀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모든 음표가 그의 손끝에서 놀았다. 굳이 현란하게 손짓하지 않아도 음악은 충분히 다채로웠고 애써 건반을 힘껏 누르지 않아도 어마어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면의 힘이 외부로 흘러넘쳐 저절로 손이 움직이듯, 그의 피아노 연주는 무심한 듯 자연스러웠다.
지난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내한공연 무대에서 스카를라티에서 스트라빈스키에 이르는 다양한 피아노곡들을 선보인 보리스 베레좁스키는 여전한 건재함을 과시하며 음악팬들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그의 건강 문제로 내한공연이 무산됐던 만큼 7년 만에 성사된 베레좁스키의 이번 리사이틀은 더욱 반가웠다. 더구나 이번 공연에선 스카를라티에서 스트라빈스키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져 그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베레좁스키는 흔히 '건반 위의 사자', 혹은 '괴력의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로 표현되는 만큼 그의 피아노 연주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따를 수 없을 만한 강한 힘과 압도적인 톤이 특징이다. 물론 이번 공연에서도 그 특유의 무시무시하고 괴력을 느낄 수 있었다. 버르토크의 소나타에서 그는 피아노를 마치 타악기 다루듯 거침없이 연주해냈고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에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한 강력한 파워를 뿜어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톤과 강력한 힘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곡이든 매우 쉽고 단순하게 표현해내는 그의 악곡 해석능력이었다.
베레좁스키는 어떤 음악작품이든 그 곡을 이루는 여러 성부의 위계 구조를 단번에 파악해 중요하고 핵심적인 멜로디 라인을 전면에 부각시키곤 했다. 덕분에 그의 연주로 들으면 아무리 복잡한 곡이라도 매우 쉽게 귀에 들어왔다. 때때로 그의 연주는 마티스나 블라맹크 등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들을 떠올리게 했다. 세부 표현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중요한 부분을 확실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첫 곡으로 연주된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제13번 '환상곡 풍의 소나타'의 경우 첫 소절에서부터 주요 주제가 야수파 그림 속에서 강조된 굵은 선처럼 확실하게 부각됐고, 반주 성부의 특징은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으로 표현됐다. 덕분에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나타의 핵심 주제는 확실하게 각인돼 갖가지 악상으로 채워져 산만한 듯 보이는 이 소나타가 실은 얼마나 통일성이 강하고 논리적인 작품인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부각하고 세부의 뉘앙스를 희생하는 그의 연주 경향은 어떤 곡에선 단점으로 비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페트루슈카'의 연주에선 흥청거리는 시장의 분위기를 표현한 도입부의 분위기는 충분히 살아났으나 그 이후 주인공 페트루슈카의 고뇌에 찬 마음을 담은 모티브를 비롯한 주요 주제들이 다소 급하게 처리돼 이 곡의 극적인 내용을 충분히 음미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감성적이고 시적인 악상으로 가득한 쇼팽의 즉흥곡에서조차 베레좁스키는 담담하고 초연한 어조를 유지했기에, 쇼팽 특유의 섬세한 표정과 맛깔스러운 표현을 기대한 음악애호가들에겐 무미건조하고 성의 없이 들렸을 것 같다. 그러나 악곡의 핵심을 파고드는 음악적인 통찰력, 콘서트홀을 꽉 채우고도 남는 무시무시한 힘, '무위자연'을 음악으로 구현해낸 듯 가식 없는 그의 연주는 여전히 강력했다.
herena88@naver.com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