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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바벨탑에 도전한 자멘호프 사망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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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바벨탑에 도전한 자멘호프 사망 100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독의 마지막 총리이자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인 헬무트 콜은 어눌한 언변과 어수룩한 행동으로 자주 놀림감이 됐다.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이 여러 권 나왔고 우리나라에도 '콜 수상의 웃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콜 농담 시리즈' 가운데 이런 것도 있다. 콜 총리에게 외국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조만간 에스페란토라는 나라를 방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오는 14일은 에스페란토를 창안한 안과 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가 세상을 떠난 지 꼬박 100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1859년 12월 15일 폴란드 비아위스토크에서 유대인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령이던 그곳에는 폴란드·독일·유대·러시아인이 섞여 살았다. 자멘호프는 말이 서로 달라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상호 이해가 부족해 민족 간에 시비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벨탑을 세우려다 하느님의 징벌로 언어가 각기 달라져 실패했다는 성경 전설을 읽고 인류가 같은 언어를 쓰면 종족 간의 편견·분쟁·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뜻이 잘 통하는 언어를 창안하기로 마음먹고 '링그베 우니베르살라'(세계어)란 이름의 보편어 초안을 만들어 1878년 12월 17일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친구들에게 공개했다. 1879년 독일의 요한 마르틴 슐라이어 신부가 발표한 세계어 '볼라퓌크'를 보고 인공어가 자연어를 제치고 통용되려면 문자언어만이 아니라 음성언어로서도 완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885년에는 기존 언어를 대체하는 세계어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버렸다.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쓰고 민족 간의 관계에서만 국제어를 쓰는 '1민족 2언어주의'로 방향으로 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87년 7월 26일 '링보 인테르나찌아'(국제어)를 담은 제1서(우누아 리브로)가 발간됐다. 러시아어로 쓰인 이 책에는 에스페란토의 917개 어근과 16개 문법, 에스페란토로 번역한 성경 구절, 에스페란토 자작시 등이 실렸다. 앞표지 뒷면에는 "이 국제어는 모든 자연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소유물이므로 저작권을 영원히 포기한다"고 적었다. 그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것이 새로운 국제어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에스페란토의 문자는 모음 5개와 자음 23개로 이뤄져 있다. '일자일음'(一字一音) 원칙에 따라 모든 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내고 항상 뒤에서 둘째 음절에 강세가 온다. 각 어간에 품사 고유의 어미를 붙여 명사는 o, 형용사는 a, 부사는 e, 동사(원형)는 i로 끝난다. 동사 어미는 시제에 따라 as(현재형), is(과거형), os(미래형)를 붙인다. 예컨대 amo(사랑)란 단어는 ama(사랑의), ame(사랑으로), ami(사랑하다), amis(사랑했다), amas(사랑한다), amos(사랑할 것이다) 등으로 활용된다. 특정한 의미를 지닌 접두어와 접미어로 많은 파생어를 만들어 단어 암기 노력을 덜었다. 아버지는 patro, 어머니는 patrino, 장인은 bopatro, 장모는 bopatrino이다. 어근은 주로 유럽 언어에서 따왔고 문법 구성은 슬라브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발음은 규칙적이어서 중국어 등 고립어와 비슷하고 구조는 한국어나 터키어처럼 교착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05년 프랑스 불로뉴에서 제1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가 열렸고 1908년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창립됐다. 그러나 자멘호프의 아름다운 꿈과 숭고한 이상은 숱한 도전에 시달렸다. 서유럽의 초기 에스페란티스토(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고발당했고,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을 집결시키려 한다"며 탄압했다. 러시아(소련) 정부는 러시아혁명 당시 "세계 프롤레타리아 상호 이해의 수단"이라며 환영했다가 나중엔 "부패한 부르주아 사상의 침투 수단이자 간첩 활동의 도구"라고 비난했다. 일본에서도 좌파 지식인들이 보급에 나섰다가 시련을 겪었다.



우리나라에 에스페란토가 언제 들어왔는지 불확실하지만 1906년 일본 잡지에 고종 황제가 에스페란토의 편리함에 찬탄했다는 글이 실려 있다. 최초의 에스페란티스토는 '임꺽정'을 쓴 소설가 홍명희로 1910년 중국에서 배웠다고 한다. 벽초(碧初)라는 호가 '첫 번째 초록인'(녹색은 에스페란토 상징색)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1916년 에스페란토에 입문한 김억과 함께 1920년 강습을 지도하며 보급에 나섰다. 이들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 특히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은 에스페란토를 적극 받아들였다. 남로당을 이끈 박헌영, 시인 변영로, 나비학자 석주명 등도 에스페란토로 글을 남겼다.





만국공통어를 만들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660여 개에 이르는 인공어 가운데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은 에스페란토가 유일하다. 지금까지 100개가 넘는 언어로 에스페란토 교재가 출간됐고 해마다 100회에 이르는 국제회의가 통역 없이 에스페란토로 진행되고 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부를 둔 세계에스페란토협회에는 62개국 협회가 가맹돼 있고 약 120개국에 200만 명의 에스페란티스토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 조선에스페란토협회가 창립됐다가 해산되고 1975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출범했다. 국내 에스페란토 사용 인구는 1만여 명을 헤아린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는 7월 22∼29일 서울의 한국외대에서 제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를 개최한다. 1994년에 이어 두 번째 한국에서 열리는 것으로, 80여 개국 2천여 명이 모여 인류 평화와 한반도 통일 방안을 논할 예정이다.



한국인치고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전 세계 720만 재외동포 가운데 1세들은 그 압박과 설움의 상처가 크고 깊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200만 외국인 가운데 상당수도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차별과 냉대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자멘호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에스페란토를 만든 정신을 되새기고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주변의 이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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