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으로 소환된 한국현대사…"현실의 답답함 풀어내"
'보통사람' '택시운전사' '1987' 등…"소재주의는 지양해야"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영화계가 한국의 아픈 현대사를 스크린으로 불러내고 있다.
한동안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면, 이번에는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스크린을 메우고 있다.
23일 개봉한 영화 '보통사람'은 1987년의 한국사회를 그린다.
평범한 형사(손현주)가 국가가 조작한 연쇄살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살인사건, 4·13 호헌조치, 6월항쟁 등 1987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줄줄이 소환한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민간인에 대한 고문과 정치공작을 서슴지 않았던 추악한 권력의 민낯을 보여줌으로써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이날 함께 간판을 내건 '프리즌'은 각종 범죄가 판치는 교도소가 무대지만, 1995년이 시대적 배경이다. 1995년은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대형 비리가 터져 나온 해이다.
나현 감독은 "사회가 어지럽고 시스템이 엉망이면 교도소 분위기도 험악하다는 점에 착안해 1995년을 배경으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선보인 '더 킹'은 권력을 좇는 한 남자의 흥망성쇠를 그리며 한국 현대사를 훑는다. 전두환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을 아우른다. 대통령 취임식 등 주요 장면은 아예 뉴스 화면을 삽입해 다큐멘터리 느낌을 줬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은 올 한해 계속해서 스크린을 수놓을 예정이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택시운전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소재로 한 '1987', 1998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숨진 고 김훈 중위의 의문사 사건을 다룬 '아버지의 전쟁' 등이 제작 중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현재 개봉하거나 개봉을 앞둔 영화들은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 초기에 기획된 영화들"일며 "현실의 답답함을 과거를 거울삼아 풀어보려는 창작자들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풀이했다.
윤 평론가는 "과거에는 현재의 정치판을 이야기하기 위해 왕을 중심으로 하는 사극이 많이 제작됐다"면서 "이제는 한국 근현대사로 옮겨오면서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도 "과거의 한국영화들에 결여됐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문제의식들을 적절한 재미와 감동, 교훈을 통해 전달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김형호 영화시장 분석가는 "이런 소재의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표현의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흥행코드로 떠오르기도 했다.
2011년 '도가니'(2011년)가 그 출발점이다. 청각 장애인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466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 테이프를 끊었다. 2012년 사법부의 문제를 꼬집은 '부러진 화살'(2012년)도 346만 명을 불러모았고, 2013년에는 '변호인'이 '천만 영화' 대열에 올랐다. 2015년 '내부자들'도 707만명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다만, 일각에선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기시감'을 지적하기도 한다.
얼마 전 '보통사람' 언론 시사회 직후 간담회에서 김봉한 감독에게 주어진 첫 질문은 "'더 킹'과 '내부자들'을 참고하지 않았느냐"였다. '보통사람'에서 나온 고급요정에서의 검사들 술자리 장면 등은 다른 두 영화가 그린 장면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김 감독은 "레퍼런스로 삼지 않았다"고 답했다.
영화가 완성도보다는 소재에만 집중하는 '소재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윤 평론가는 "지금까지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지만, 영화의 콘셉트나 주제에 나름의 특색 없이 시대적 배경이나 실화 소재만으로 어필하려는 경향은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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