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암살 한달] '짙은' 북한 소행…그러나 수사는 미완
북한 국적 주요 용의자들 도주·은신…'조연' 외국인 여성만 체포·기소
심증만 있고 확증 없어…암살에 쓰인 '화학무기' 출처 확인 난항
(쿠알라룸푸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설사 5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바깥에서 기다릴 것이다."
할릿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지난 7일 치외법권 지역인 북한대사관에 은신한 김정남 살해 용의자들을 겨냥해 이같이 말했다.
배후를 놓고 심증만 있지 확증은 없는 이번 사건의 수사가 한계를 드러내며 장기화를 예고한 것이다.
지금까지 경찰이 지목한 용의자는 총 10명으로 이 중 8명은 북한 국적자, 2명은 외국인 여성이다. 겉으로 봐선 김정남 암살의 배후에 김정은 북한 정권이 있다는 의심이 짙지만, 경찰 수사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핵심 용의자들은 도피 또는 은신 중이고 그나마 붙잡힌 용의자는 '조연'에 불과해 사건의 전모가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다.
용의자들 가운데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 등 두 여성은 지난달 13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 얼굴에 독극물을 묻혀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지난 1일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김정남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 영상이나 TV 쇼를 찍는 것으로 알았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 국적 용의자들의 꾐에 빠졌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나흘 만에 북한 국적자로는 유일하게 리정철(46)이 체포되면서 경찰 수사가 탄력을 받는 듯했다. 리정철이 약학과 화학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북한 측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범행에 무게가 실렸다.
경찰은 리정철이 주 용의자들에게 차량을 제공하는 등 범행을 지원한 정황을 포착했지만,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가 혐의를 계속 부인하자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풀어줬다.
핵심 용의자인 리지현(33), 홍송학(34), 오종길(55), 리재남(57) 등 4명은 범행 직후 인도네시아, 아랍에미리트(UAE), 러시아를 거쳐 평양으로 도피했다.
경찰은 이들을 쫓기 위해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인터폴 미가입국인 데다가 말레이와 범죄인 인도협정도 없어 행방을 확인하기 어렵고 찾는다 해도 강제 송환할 방법이 없다.
남은 용의자는 현광성(44) 주말레이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북한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 리지우(30) 등 3명이다. 말레이 경찰은 이들이 말레이에 머무는 것으로 파악하고 신병 확보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그렇지만 수사는 벽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이들이 북한대사관에 숨어있어 검거한 길이 없다. 김욱일에 대해서는 체포 영장까지 발부받아 압박 수위를 높였지만 실효성이 없고 현광성은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이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경찰이 북한의 수사 협조를 요청하고 있지만, 김정남을 자연사라고 주장하는 북한이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들이 경찰 수사에 응한다 해도 리정철의 재판이 될 공산이 크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진 현광성, 김욱일의 행각은 김정남 살해 직후 출국한 북한인 4명을 공항에서 배웅했고, 현광성의 경우 도주 용의자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현지 맨션을 방문했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배후를 규명하는 데 김정남 암살에 쓰인 독극물의 출처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김정남 시신의 부검 결과 맹독성 신경작용제 'VX'가 검출됐다. 유엔이 금지하는 화학무기인 VX는 북한을 비롯한 일부국가가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 용의자들의 국적이 북한이고 김정남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으로 암살 위협을 받아온 점, 김정남 살해에 VX가 쓰인 점 등을 고려할 때 북한 정권의 배후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문제는 이를 확인해줄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 최근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말레이를 방문한 리동일 전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는 김정남 사인이 심장질환이라며 부검 결과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를 부인했다.
북한이 보안이 보장되는 외교행낭을 통해 VX에 반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가설에 불과하다. 말레이 경찰은 아직 VX 출처와 반입 경로에 대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상 이름이 '김철'인 김정남의 신원이 확인됨에 따라 시신 처리 문제가 남아있다.
시신 인계를 요구하는 북한에 맞서 말레이는 가족들에게 시신 인수 우선권이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 유튜브 영상을 통해 "내 아버지는 며칠 전에 피살됐다"고 말했지만,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레이를 방문, 시신을 인수할지는 불투명하다. 유가족이나 친족이 나서지 않으면 북한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을 놓고 충돌한 북한과 말레이가 자국 거주 상대국 국민의 출국을 금지한 '인질 외교'도 변수로 떠올랐다.
자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협상 의지를 보인 말레이가 자국에 남아있는 북한 국적 용의자들의 조사 후 출국 허용 등 타협점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김정남 피살 사건이 무수한 의혹만 남기고 미궁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
kms123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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