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구제역까지 엎친데 덮친격…방역 공무원 '파김치'
석 달째 방역·매몰작업에 피로 가중…일부 병원신세도
식욕부진·불면증 등 정신적 스트레스 극심, 외상 후 치료까지
(수원=연합뉴스) 김인유 기자 =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석 달째 방역과 매몰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공무원들의 몸과 정신이 극도로 지쳐가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다행히 16일째 추가 AI 발생이 없어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지만, 9일 연천 젖소 농가에서 구제역 확진 판정이 나오면서 도내 전 시·군이 다시 구제역 예방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
◇ 석 달간 AI랑 싸웠는데 '구제역 공습'…지쳐가는 공무원들
지난해 11월 20일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가업리의 한 산란계 농장에서 발생한 AI는 안성과 포천, 이천, 평택 등 도내 13개 시·군으로 확산했다.
발생 직후부터 시·군마다 공무원들이 동원돼 통제초소와 거점소독시설을 만들어 방역활동을 벌였다.
AI가 침투하고 나면 농민들이 애써 키운 수백만 마리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해야 하기에 공무원들은 3교대씩 조를 짜 통제초소와 소독시설을 지키며 AI 유입차단에 주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AI는 도내 13개 시·군에 전염돼 202개 농가에서 1천573만7천마리를 매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업에는 연인원 1만3천7명의 공무원이 투입됐다.
장기간에 걸친 방역초소 근무에 지쳐있던 공무원들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매몰작업에 참여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했다.
동물들을 살처분하는 일은 용역업체 근로자들이 한다고 하지만 공무원들도 동물들이 죽어 나가는 현장을 감독해야 하므로 이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4개 농가에서 82만마리를 매몰처분한 용인시의 축산분야 공무원 이모(34)씨는 "살처분 현장에는 올해 처음 투입됐는데 농민들이 정성껏 키운 소중한 동물을 죽이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면서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초소근무 하는 것보다 살처분작업을 하는 게 훨씬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축산분야에서 27년간 일했다는 안성시의 베테랑 공무원 김모(48)씨는 수없이 많이 살처분 업무를 해 와서 그런지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구제역에다가 AI까지 여러 사태를 겪으면서 살처분 작업을 총 36번이나 해 와서 그런지 처음에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무척 심했지만, 이제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면서 "그러나, 젊은 공무원들은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동물을 묻는 일을 무척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동물방역 업무를 담당하는 축산직 공무원들과 달리 초소근무나 매몰지 작업에 차출된 일반직 공무원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한다.
AI나 구제역 현장 종사자들은 식욕부진이나 불면증, 심지어는 환청까지 들리는 증세를 호소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는다.
AI 매몰작업에 참여한 공무원들과 농장주, 민간용역 근로자들의 스트레스장애를 치유하기 위해 경기도가 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와 협약을 맺고 재난 심리회복 상담지원을 하고 있다.
10일 현재 AI 살처분에 참여했던 공무원 가운데 42명이 심리상담을 받았다.
AI 사태가 3개월째 이어지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육체적 피로를 호소하는 공무원도 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관계자는 "상담을 받은 공무원 중에는 정신적 스트레스뿐 아니라 3개월째 이어지는 장시간의 근무로 인한 신체적 피로에 대해 고충을 많이 토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간의 야외 근무로 인해 과로로 쓰러지거나, 집중력이 떨어져 안전사고를 당하는 공무원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4일 안성시의 한 공무원은 살처분을 마치고 시청에 들어온 뒤 계단을 올라가다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또 같은 안성시 공무원 A씨가 지난해 12월 20일 사료를 덤프차량에 옮겨 싣다가 손가락을 심하게 다쳤다.
공무원들은 방역활동 근무를 하지 않는 날에는 자신이 맡고 있던 기존의 업무처리도 병행해야 한다.
여주시의 한 공무원은 "추운 곳에서 벌벌 떨며 방역초소 근무를 하고 들어왔어도 잘 쉴 수가 없다. 민원인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내 몸이 힘들다고 미룰 수야 없지 않으냐"면서 "전화 받을 시간도 솔직히 아깝다"고 말했다.
◇ AI 잠잠하니 구제역 '발등의 불'…구제역 대응체제로 전환
경기도 13개 시·군을 휩쓸었던 AI는 다행히 최근 16일 동안 추가 발생 없이 잠잠한 상태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이번에는 구제역이 우려된다.
충북 보은과 전북 정읍에 이어 연천에서도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경기도에도 비상이 걸렸다.
경기도 공무원들은 AI와 구제역을 동시에 겪었던 2011년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2000년 이후 AI와 구제역의 피해가 가장 컸던 때는 2011년이다.
당시 구제역은 2010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3월 21일까지 모두 19개 시·군에서 발생, 2천390농가의 소와 돼지 등 발굽이 2개인 우제류 가축 174만2천694마리가 땅속에 묻혔다.
당시 경기도에서는 안성·이천·화성·평택·파주·양주·용인·여주·연천 등 10개 시·군에서 H5N1형 AI가 발생해 모두 86농가가 234만3천 마리의 닭과 오리를 매몰했다.
이들 지자체 대부분이 AI와 구제역을 동시에 겪었다.
경기도는 올해 구제역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도내 1만4천925농가의 우제류 가축 사육농가를 대상으로 백신 예방접종 여부를 점검하고 우선 오는 12일까지 민간 동물병원 수의사 90명을 동원해 소 42만3천 마리에 대한 백신 접종을 완료하기로 했다.
기존의 AI 방역 초소와 거점소독시설을 구제역 예방시설로 함께 운영하면서 구제역 확산방지에 주력하기로 했다.
10일 현재 도내 17개 시·군에서는 공무원 671명이 투입돼 51개 통제초소와 42개 거점소독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기도 재난안전대책본부 관계자는 "AI가 잠잠해졌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퍼질지도 모르는 비상상황에서 구제역 사태까지 맞게 돼 당황스럽다"면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시·군 공무원들과 함께 구제역 확산을 막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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