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가서 당했더니 휘청거린다' 농담처럼 던지던 오규원"
10주기 맞아 첫 시집 '분명한 사건' 복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나를 본 그는 지나는 말처럼 남산에 가서 당했더니 몸이 휘청거린다며 농담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유신 시절의 저승악마 같던, 그 남산이라니 왜? 내 순진한 질문에 마지못해 한 대답이 내 칼럼 때문이었단다."
문학평론가 김병익(79)이 전하는 시인 오규원(1941∼2007)의 일화다. 시인은 1970년대 태평양화학에서 홍보지 '향장'을 만드는 일을 했다. 당시 신문기자로 일하던 김병익을 돕겠다며 홍보지에 연재 지면을 내준 게 화근이 됐다. 김병익은 해외 뉴스를 소개하며 독재권력의 부패 이야기를 들먹이곤 했다. 홍보지가 겁도 없이 불량한 글을 싣느냐는 게 몽둥이질의 이유였다.
김병익은 "내가 일간지 기자였고 그는 홍보지 편집자였기에 만만한 그가 대신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며 "그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던 것이 30년 전의 그 탓이 아니었을까 송구스러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올해 10주기를 맞은 '날(生) 이미지 시인' 오규원의 첫 시집 '분명한 사건'(1971·한림출판사)이 기일인 2일 다시 출간됐다. 문학과지성사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R 시리즈' 11번째 책이다. 시인의 문우인 김병익은 발문에서 1970년 말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그의 시를 싣기 위해 처음 만날 당시 인상부터 문지 시인선 장정이 '촌스럽다'며 시인이 표지 도안을 만들어준 일화, 투병 기간 찾아가보지 못한 회한까지 적었다.
시인은 1965∼1968년 3회 추천 완료로 등단했다. '분명한 사건'에는 등단을 전후로 1964∼1971년 쓴 시편 중에서 30편을 골라 실었다. 이념과 관념, 주관과 감상을 배제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투명하게 그린다는 훗날의 시론은 이 시집에서 언어에 대한 고민으로 그 뿌리를 드러낸다. 시인은 상투적으로 퇴색한 말들 사이를 옮겨다니며 언어의 생동감을 찾는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의 모자다./ 늘 방황하는 기사/ 아이반호의/ 꿈 많은 말발굽쇠다./ 닳아빠진 인식의/ 길가/ 망명정부의 청사처럼/ 텅 빈/ 상상, 언어는/ 가끔 울리는/ 퇴직한 외교관댁의/ 초인종이다." ('현상실험' 전문)
동료 문인과 서울예대 제자들은 '10주기 준비위원회'를 꾸려 시인을 기리고 있다. 이날 오후에는 시인이 잠든 강화도 전등사의 시목(詩木)을 참배하고 저녁에는 사진전문 갤러리 류가헌에서 오규원 시 낭독회를 연다. 류가헌에서는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 육필 등 유품을 전시하는 특별전 '봄은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가 이달 26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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