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불출마 배경 토로…'정치 소모품' 요구에 대권꿈 접었나(종합)
'개헌 빅텐트'로 정치권 접촉…'불쏘시개' 역할 주문받고 좌절한듯
의혹공세·가짜뉴스 조롱에 속앓이…준비 부족해 지지율 하락 자초한 측면도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국제기구 수장에서 정치 신인으로 변신을 시도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끝내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혀 대권 꿈을 접었다.
'대통합'과 '정치교체'라는 이상을 품고 지난달 12일 귀국, 범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던 반 전 총장은 20일 만인 1일 오후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새벽 불출마를 결심하고 회견문을 직접 썼다. 측근들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실무진은 심지어 여의도 캠프 사무실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반 전 총장은 회견문에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를 불출마 사유 가운데 하나로 적었다.
반 전 총장이 기자회견 직후 마포 사무실에서 참모들에게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그는 정치인들로부터 '소모품'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이 보수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겠다고 했다. 이런 뜻을 설 연휴까지 만난 정치인들에게 털어놨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반 전 총장은 "표를 얻으려면 '나는 보수 쪽'이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를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과 같은 얘기"라고 해석했다. 특정 진영의 집권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요구받은 셈이다.
이어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얘기하는 사람이 없더라"며 "정치가 정말 이런 건가"라고 비정한 정치 현실에 대한 좌절감도 털어놨다.
반 전 총장은 정치교체의 수단을 개헌으로 봤다. 그는 여야 정치인들에게 '개헌 연대'를 설파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순수한 애국심"에서 비롯됐다는 분권형 개헌과 차기 대통령 임기 단축은 결국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호응을 얻지 못했다.
좀처럼 바람을 타지 못하니 지지율은 빠지기 시작했다. 한때 독보적 1위를 달렸지만, 귀국 3주째가 되면서 그의 지지율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10%대에 머물렀다.
자연스럽게 그가 '러브콜'을 보낸 야권 인사들은 물론 새누리당 의원들, 심지어 고향인 충청권 의원들조차 합류를 망설이는 지경이 됐다.
좀처럼 세(勢)가 형성되지 않으니 지지율이 반등의 계기를 잡지 못하고, 지지율이 지지부진하니 세가 형성되지 않는 '악순환'에 빠져든 셈이다.
지지율 하락에 고민이 커진 반 전 총장은 자신을 향해 쏟아진 정치권의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뉴스'로 속앓이를 했다고 토로했다.
'박연차 23만 달러 수수 의혹'이 대표적이다.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며 사실관계를 조목조목 반박했지만, 야권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동생과 조카의 사기 혐의와 관련해서도 "나는 전혀 몰랐고 무관하다"는 손사래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퇴주잔 논란'은 반 전 총장 측이 꼽는 대표적인 '가짜뉴스' 사례다. 선친 묘소에 성묘하는 동영상이 악의적으로 편집·유포돼 조롱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추가 의혹을 두고 대대적 검증에 나설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반 전 총장 측이 부담을 느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반 전 총장이 의욕만 앞선 나머지 중도하차를 자초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행보를 서두른 탓에 우왕좌왕, 걸음이 꼬이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10년간 외국에 머무른 그가 국내 실정에 어두웠던 데다 선거 준비가 미흡했다는 점은 캠프 내부에서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몇몇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나쁜 X들"이라고 격한 반응을 보이는 등 언론 대응 방식도 현실감이 떨어졌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려고 무소속으로 버티기에는 인력, 조직, 자금 등 모든 측면에서 압박을 받았으리라는 해석이 나온다.
zhe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