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 장기화에 괴로운 재일동포…"우리 사정도 알아달라"
오공태 재일 민단장 하소연…한일관계 악화에 일본인 손가락질
노년층 중심 민단과는 달리 젊은 층 재일한인회는 '입장 안 내'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위안부 소녀상과 한일 합의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이 한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갈등의 한가운데에는 오랜 세월 피해를 안고 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있지만, 싸움이 오래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바로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으로 흘러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이다.
이들의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재일민단) 중앙본부는 지난달 13일 신년회에서 고심끝에 "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는 "한국과 일본, 국가 간의 약속이 쉽게 깨어지면 안된다"는 내용을 담은 고육지책이었다.
일본 내에서 재일동포를 보는 시선이 싸늘해진 상황에서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낸 입장이지만, 한일갈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문제의 입장발표로 한국 내에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지난달 31일 밤 일본 도쿄(東京) 시내에서 한국 기자들을 만난 재일민단 중앙본부의 오공태 단장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생각을 밝힌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오 단장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도 다를 바 없다. 일본 땅에서 살아온 부모님을 뒀다. 우리도 식민지 시대가 얼마나 가혹한지 알고 있다"며 "하지만 한일 양국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재일동포들은 너무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호소했다.
민단에 따르면 부산 소녀상 설치와 이후 한일 관계의 악화로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유언·무언의 비난과 함께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민단의 한재은 감찰위원장은 "고깃집을 하고 있는데 일본 손님들로부터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라며 다른 가게로 가겠다는 말을 들었다.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니 다른 손님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며 "자식, 손자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계속 일본에서 살아야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민단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도 아베 총리를 정말 싫어한다. 재일동포에게 일본 지방선거의 투표권을 달라는 주장은 아베 정권에서는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 됐다"며 "일본 정치가가 직접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찾아가 과거 군국주의를 반성하고 진심을 가지고 사과하면 될 것을 왜 안 하는지 답답하다"고 했다.
재일동포들의 생각이 한국에 사는 국민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한일 갈등 상황이 계속되면 아베 총리만 좋아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한일 갈등이 격화하면서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다. 여론조사 주체에 따라 수치는 다르지만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60%대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지율은 지난달 30일 발표된 니혼게이자이의 조사에서는 66%, 요미우리의 조사에서는 61%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나온 '소녀상 철거' 주장은, 한국에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민단에 대한 융단폭격식 비판으로 쏟아졌다. 욕설이 섞였고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오 단장은 자신에 대한 인터넷 댓글도 읽었다고 했다.
일본에선 일본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소녀상 철거를 주장했다가 한국으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는 이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민단에 따르면 입장 발표 전에는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재일동포들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난 6일 민단 뿐 아니라 한인회 등 다른 재외동포 단체들도 참석한 신년 모임에서 이준규 대사는 "직접 피해입은 여러분이 뭔가 소리를 내주셔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단 측은 "그런 얘기가 있긴 했지만 입장을 내는 과정에서 (한국) 대사의 발언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매년 80억 원가량을 민단에 지원하고 있다.
민단이 부산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목소리를 냈지만, 재일동포 내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은 갈려 있다. 민단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해방 직후 일본으로 온 이른바 '올드커머(Old Comer)' 중심의 단체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 온 '뉴 커머(New Comer)'가 모인 재일 한인회는 아직 입장을 내지 않고 있고, 좌파 계열의 다른 단체들은 오히려 민단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오 단장은 "우리도 한국 국적의 한국 국민이고 한국의 발전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한일 갈등이 심해지면서 힘들어하는 재일동포의 삶도 알아줬으면 좋겠다"며 "조만간 한국에 가서 직접 한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우리 상황을 알릴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b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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