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바뀐 역사교과서…'오락가락' 행정에 현장 혼란 가중(종합)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용으로 검정 집필기준 완화…국정은 그대로
연구학교 거부·국정교과서 금지법 등 현장 적용까지 험로
(세종=연합뉴스) 이윤영 고유선 기자 = 교육부가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됐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검정교과서에 한해 쓸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교과서 논란이 새로운 장을 맞을지 주목된다.
국정교과서의 경우 친일행위와 새마을운동의 한계점, 일본군 위안부, 제주 4.3사건 등의 서술을 강화했지만 검정과 달리 '대한민국 수립' 표현이 유지되고 박정희 전 대통령 서술도 크게 바뀌지 않아 반발이 여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용…검정 집필기준 완화
31일 교육부가 발표한 새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대한민국 건국 시기 서술과 관련해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를 언제로 볼 것인가는 현대사 기술에서 보수와 진보진영 간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던 부분이다.
보수진영은 1948년 8월15일을 단순히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수립된 날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이는 현행 검정교과서에서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기술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주장이다.
교육부도 현행 검정교과서가 '좌편향'된 대표적인 예로 바로 이 부분을 들면서 대한민국 정통성 강화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실제 교육부가 역사교과서를 검정에서 국정으로 전환키로 한 뒤 지난해 11월 28일 공개한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신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은 이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 등 '친일파' 세력을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탈바꿈시키고, 항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라며 반발해 왔다.
교육부는 지난해 12월27일 국정교과서 현장적용 방안을 발표하면서 국정교과서 단일화 정책을 포기하고 내년부터 국·검정을 혼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근에는 새로 개발될 검정교과서 역시 '무늬만 검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집필진이 집단으로 집필거부 선언에 나서는 등 교과서 제작 차질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었다.
결국 교육부는 검정교과서에 한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허용하는 것으로 비판 의견을 수용했다.
'8·15 이후 전개된 대한민국의 수립 과정을 파악한다'는 집필기준 자체는 국정교과서의 편찬기준과 동일하지만 집필 유의점에서 '대한민국 출범에 대해 대한민국 수립,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에 유의한다'는 문구를 추가한 것이다.
이는 검정교과서 제작 시한이 촉박한 상황 속에서 해당 문구의 표현 하나를 놓고 더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은 안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금용한 교육부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장은 "검정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썼다고 해서 검정 심사에서 떨어뜨리지는 않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 국정은 '대한민국 수립' 표현 유지…친일·위안부 서술 강화
교육부는 이날 검정 집필기준과 함께 국정 역사교과서의 최종본도 확정 발표했다.
교육부는 이준식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제주 4·3 사건 피해자 유족을 직접 만나 의견을 듣는 등 현장검토본에 대한 국민 의견을 다양하게 수용하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종본의 큰 틀은 지난해 11월 28일 공개된 현장검토본과 대동소이하다. '대한민국 수립' 표현도 검정교과서와 달리 국정에서는 그대로 유지된다.
다만 현장검토본에서 '축소 서술' 지적을 받았던 친일파 관련 내용,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 등은 최종본에서 일부 보강됐다.
친일파의 친일행위를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라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제시했으며,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서는 수요집회 1천회를 기념해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사실 등이 추가됐다.
현대사 부분에서는 김구 선생의 암살 사실, 제주 4·3 사건과 관련해 '사건의 진상은 남북한 대치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로 몰린 무고한 희생자들은 물론 그들의 유족까지 많은 피해를 당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미화 논란이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과 관련해서도 '관 주도의 의식 개혁 운동으로 전개됐다'는 한계점을 명시했다.
한국의 수출 산업을 이끈 기업가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정주영이 조선소 건립 자금 마련을 위해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영국 은행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교과서에 싣기에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라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 포니 개발을 추진했다'는 일화로 대체했다.
◇ 오락가락 행정에 비판 목소리…교과서 운명 '안갯속'
하지만 지난해 12월27일 국정교과서 현장적용 방안 발표 때만 해도 '대한민국 수립' 표현은 교육과정에 명시돼 '수정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했던 교육부가 한달만에 또 원칙을 바꾼 데 대해서는 혼란을 가중한다는 지적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교육부가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꼼수'를 부린다는 비판이, 보수진영에서는 교육부가 단일 국정교과서 적용 폐기에 이어 이번에 또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현행 검정 역사교과서 저자는 "교육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은 교육과정에 위배되는 것이라 쓸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서 한 발 물러섰다"며 "각계의 비판을 무마시키려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국정교과서 최종본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 서술 분량이 현장검토본과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등 그동안 쟁점이 됐던 부분은 큰 변함이 없어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당장 3월 새 학기부터 국정교과서를 사용할 연구학교 지정도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다음달 10일까지 희망하는 학교를 모두 연구학교로 지정해달라고 전국 시·도 교육청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17개 교육청 가운데 9곳은 교육부의 연구학교 지정 공문도 일선 학교에 내려보내지 않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따른 '벚꽃 대선' 가능성에 점차 무게가 실리면서 일각에서는 국정교과서가 올해 극소수 연구학교에서만 쓰이고 폐기되는 1년짜리 교과서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국정교과서 사용을 법으로 금지하려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이달 전체회의에서 국정 역사교과용 도서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역사 교과용 도서의 다양성 보장에 관한 특별법'(국정교과서 금지법)을 의결했다.
법안 발의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의원들은 3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도록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cin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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