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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자 "김시스터즈는 개척자…다시 돌아가도 美시장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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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자 "김시스터즈는 개척자…다시 돌아가도 美시장 도전"

김시스터즈 음악 다큐 '다방의 푸른 꿈' 개봉…남편과 고국 찾아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1950년대 '원조 한류' 걸그룹인 김시스터즈의 멤버 김민자(76)는 고모 고(故) 이난영의 명곡 '목포의 눈물'을 라이브로 선사하며 몸에 밴 탄탄한 가창력을 들려줬다. 남편인 헝가리 재즈 뮤지션 토미 빅과 함께 비브라폰을 연주하며 젊은 날의 '필' 그대로 표정에 에너지가 넘쳤다.

20일 오후 2시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아트하우스모모에서 진행된 음악 다큐멘터리 '다방의 푸른 꿈' 시사회 겸 미니콘서트에서다. 그는 26일 영화 개봉에 맞춰 남편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과 작곡가 김해송 부부의 두 딸 김숙자(78)·故 김애자와 조카 김민자(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로 구성됐다.

1953년 결성된 이들은 음반을 내고 활동한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자 아시아 걸그룹 최초로 1959년 미국에 진출했다.

이들은 '뮤직 패밀리'란 혈통답게 노래와 춤은 물론 가야금, 장구, 기타,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아이리시 백파이프 등 20개가 넘는 동서양 악기를 프로페셔널하게 연주했다.

1959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9월 미국 CBS 인기 TV쇼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으니 바로 명성을 얻은 셈이다.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스톤스 등이 출연하던 이 프로그램에 이들은 무려 22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동양에서 온 마녀'로 불렸다.

이난영의 대표곡 제목이기도 한 '다방의 푸른 꿈'은 1960년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김시스터즈의 성공 신화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다. 이난영의 생전 모습과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김해송의 이야기까지 곁들여진 가족사이기도 하다.

연합뉴스가 김민자와 만난 건 2년 만이다. 그는 이 작품이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고국을 찾은 적이 있다.

"2년 전 28년 만에 한국땅을 밟은 걸 시작으로 이 작품 덕에 세 번째 한국에 왔네요. 한국말을 잘하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맴돌며 단어가 떠오르질 않아요."

영화를 두 번 감상하며 속눈썹이 떨어질 정도로 울었다는 그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 준 영화를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기뻤다. 우리 인생이 70분에 담긴 것이 감개무량하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팀이 결성된 계기는 암울했던 한국사와 맞물린다.

이난영은 한국전쟁 당시 김해송이 납북되고 중구 필동 2가 집이 폭격을 맞아 무너져내리자 오빠 이봉룡과 함께 '시스터 그룹'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밥을 먹고 살아야 했죠.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돈 대신 위스키를 받아 그걸 팔아 살림에 보탰어요."

미8군의 스타가 되자 라스베이거스에서 프로덕션을 하는 톰 볼의 귀에 들어갔고 이들은 오디션을 본 끝에 미국 진출 계약을 맺었다.

영어도 모르는 세 멤버는 낯선 땅에서 긴장과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그는 "미국에 처음 가서 작은 아파트에 살았다"며 "셋이서 샴푸로 머리를 감았는데 눈이 너무 아프더라. 알고 보니 샴푸가 아니라 바닥을 닦는 세제였다. 병원에 가서 눈을 씻어냈는데 지금은 우습지만 정말 창피한 일이 많았다"고 웃었다.

첫 무대는 라스베이거스 썬더볼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 가수들의 쇼였다.

"첫날 무대에 올랐는데 무릎이 떨리고 무서웠어요. 영어 노래를 많이 알지 못해 대여섯 곡을 불렀는데 첫 노래가 끝나자마자 손님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했죠. 그때 마음을 놓았어요."

이후 스타더스트 호텔에서 8개월간 장기 계약을 맺은 뒤 다양한 악기를 섭렵해 무대에 올랐다.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할 기회도 이때 얻었다. 그는 온종일 연습하며 고단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것이라고 했다.

다큐에서처럼 여전히 열정적으로 드럼을 치느냐고 묻자 "스틱을 안 잡은 지 오래됐다"며 "이제 손, 발이 안 돌아간다. 다행히 목소리는 남아있다"고 웃었다.

다시 60년 전으로 돌아가도 도전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좋은 질문"이라며 "고생도 많이 하고 힘들었지만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했고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음악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결혼해 올해 3월 20일이 50주년이에요. 여느 부부처럼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부부 싸움을 했는데 화가 나서 밤늦게 나갔다가 돌아오니 남편이 '저스트 포 유'란 러브송을 만들어뒀더군요. 하하."

여전히 헝가리에서 남편과 함께 공연하며 현역으로 사는 그는 음악과 무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이 라이프'죠. 우린 뮤직 패밀리로 태어나 음악을 타고났어요. 노래를 시작할 때 '아, 이게 우리 인생이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리고는 김시스터즈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어려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미국에서 고생했다"며 "개척자 역할을 한 셈이다. 김시스터즈란 이름을 꼭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방의 푸른 꿈'을 연출한 김대현 감독은 "1963년 김시스터즈와 이난영이 '에드 설리번 쇼'에서 '마이클 노를 저어라'란 곡을 부르는 영상을 보고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2011년 시작된 아이디어였고 2013년 부다페스트로 가 김민자 씨를 인터뷰하며 제작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목포에서 시작된 한 음악 가족의 이야기가 미국을 거쳐 부다페스트까지 이어졌다"며 "다행히 미국에 자료가 남아있어 제작이 가능했다. 구글과 유튜브, 이베이 등에서 자료를 많이 찾았는데 디지털 기술의 발전 덕을 봤다"고 덧붙였다.

mimi@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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