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경찰의 한인 살해는 두테르테 정부 법치붕괴 징후"
마약단속 경찰에 '살인면허'…공권력 앞세운 유사범죄 우려
"또 침묵하면 또 죽는다"…강력범죄 규탄·대책 촉구 교민 청원운동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작년 10월 필리핀에서 50대 한국인 사업가가 현지 경찰관들에 의해 납치·살해된 것으로 드러나자 필리핀의 공권력 부패와 법치 실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경찰에 사실상 '살인면허'를 주자 인권경시 풍조가 커지고 부패 경찰관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유사범죄가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의 펠림 카인 아시아지부 부지부장은 19일(현지시간) HRW 홈페이지를 통해 필리핀 경찰관들의 지모(53) 씨 살해 사건은 두테르테 대통령 아래에서 법치가 무너지는 불길한 징후라고 지적했다.
카인 부지부장은 "지 씨 피살은 필리핀에서 지난 6개월간 5세 어린이를 비롯해 수천 명이 죽은 마약과의 전쟁 도중에 벌어진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라며 두테르테 대통령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에 "저항하는 마약용의자를 사살해도 좋다"며 '살인면허'를 주고 형사처벌을 받으면 사면권을 행사하겠다는 약속한 것이 마약 단속을 빌미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여지를 키웠다는 것이다.
지 씨의 경우 필리핀 중부 관광도시 앙헬레스의 자택 근처에서 마약 관련 혐의가 있다며 가짜 압수영장을 제시한 경찰관들에 의해 납치됐다.
이들 경찰관은 지 씨를 필리핀 경찰청사로 끌고 가 살해한 뒤 화장했다. 이들은 납치 당일 지 씨를 살해했지만, 지 씨 가족들에게 몸값으로 800만 페소(1억9천여만 원)를 요구해 이 중 500만 페소(1억2천여만 원)를 받았다.
필리핀에서는 경찰이 마약 단속을 핑계 삼아 무고한 사람을 연행해 돈을 뜯어내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범죄감시단체인 '평화질서회복운동'은 작년 6월 말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과 함께 마약 소탕전에 나선 이후 이런 사건이 최소 11건 일어났다.
작년 11월에는 한 중국인이 마약 단속 경찰관에게 끌려가 석방 대가로 300만 페소(7천여만 원)를 요구받았다. 이 중국인은 100만 페소(2천300여만 원)를 주고 풀려날 수 있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경찰관 봉급의 2배 인상을 추진하며 급전이 필요하면 자신에게 오라고 할 정도로 경찰관들의 생계가 열악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인 부지부장은 "필리핀 정부가 마약용의자 사살을 멈추고 수천 명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물을 때까지 지 씨 살해 사건은 경찰관들이 돈을 노리고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전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판필로 락손 필리핀 상원의원은 "한국인 납치·피살과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경찰의 권한 남용 제동 등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필리핀의 한국인 교민들 사이에서는 "또 침묵하면 또 죽는다"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강력범죄를 규탄하며 관계 당국의 대책을 촉구하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 교민은 "필리핀 정부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우리 정부도 강하게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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