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TSMC의 나라로 익숙한 대만. 대만은 한국과 공통점이 많다. 두 나라는 높은 무역 의존도, 인구 고령화, 안보 리스크, IT 같은 특정 산업에 대한 높은 의존도까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눈에 띄는 차이점은 한국이 경제 규모나 인구 면에서 대만보다 월등한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도 한국 상장기업의 전체 시가총액은 대만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의 명목 GDP는 약 1조 7천억 달러로 대만의 2배가 넘는다. 글로벌 투자자금의 벤치마크 지수인 MSCI(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신흥국 지수 내 국가 비중도 대만(16.6%)이 한국(12.2%)을 앞선다.
대만 가권 지수는 지난 23일에도 미국 반도체사 엔비디아의 실적 호조로 전 거래일보다 0.19% 상승한 1만 8,889.19포인트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다시 한번 경신했다.
엔비디아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히는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효과'에 더해 증시 선진화를 위한 대만 금융 당국의 장기간 노력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기업 지배구조 탈바꿈 나선 대만 정부대만 증시가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정부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대만 정부의 움직임은 아시안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밀려오던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8년 정부는 기업의 초과 이익에 대한 유보세를 도입했다. 기업이 납입자본금과 생산설비를 위한 자금 이상으로 이익을 보유하면 그 초과 이익에 대해 10%의 추가 법인세를 부과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에도 대만은 2003년 일명 행정원을 출범시켜 기업지배구조 전담반을 개혁하고, 지배구조 강화를 회사에 제안하게끔 만들었다. 2006년에는 증권거래법 일부 문항을 수정해서 이사회 기능 강화는 물론 사외이사 도입을 본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2013년에는 대만 금융감독위원회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업지배구조센터'를 설립했다.
대만 금융 당국은 또 2017년 5개년 기업 지배구조 청사진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이사회 기능 강화, 특수관계자 거래 정보 공시 강화, 해외 투자자 정보 제공, 전자투표 의무화 등이 담겼다.
우수 지배구조 기업으로 구성된 지수도 개발했다. 대만 증권거래소는 전체 상장사를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 문화를 성적에 따라 7개 구간으로 나누어 발표하고, 이 중 상위 20% 상장사를 시가총액을 바탕으로 선출해 '대만기업지배구조100지수' 등 매년 정기적으로 구성하는 지수를 개발하고 업데이트하고 있다.
해당 제도 도입 1년 뒤 상위 20%에 40개 사가 신규 진입했고, 상위 5%대에 16개 기업이 진입했다. 상위 구간 진입률은 상위 20%와 상위 5% 각각 24%와 37%로 나타났다.
대만이 이처럼 오랜 기간 증시 선진화를 추진한 이유는 기업 지배구조가 투명해야 외국인들이 대만 기업에 투자하고, 곧 대만 증시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깊숙히 들어가 보면 대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불투명한 재무구조, 과도한 순환출자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만 당국은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경영자의 부적절한 처신, 지도 등으로 투자자, 채권자 또는 이해관계자들이 손해를 입게 됐다고 보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 투자·배당 요구하되 세액공제 혜택물론 이 과정에서 재계의 저항이 없었던 건 아니다.
대만 현지 사정에 밝은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기업들은 납입자본금 이상의 이익을 유보할 경우 초과 이익금에 대해 추가 법인세를 부과하는 '유보소득세'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 전 회장은 이 정책을 두고 "반(反)성장세"라며 강하게 비판해왔다. 93세의 창 전 회장은 최근에도 해당 과세제도 자체를 폐지해 달라고 촉구할 정도로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대만 정부는 유보세를 전면 폐지할 수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은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기업들을 독려하기 위한 조치를 동시에 취하고 있다.
기존 10%이던 유보세율을 지난 2018년 5%로 인하하면서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다. 기업 부담은 줄여주되 배당과 투자를 계속 하라는 것이다.
투자 유인책도 함께 내놓고 있다. 대만 정부는 지난해부터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15%에서 25%로 높였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세우고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쓴 결과는 증시를 통해 하나씩 입증되기 시작했다.
◇ 정책 성과 괄목…배당수익률 5% 육박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대만 금융당국의 정책적 성과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대만 증시에서 반도체 업종을 제외한 전체 상장사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0년 전 1.7배에서 현재 2.2배 수준으로 뛰었다. 아시아태평양 주요 12개 나라 가운데 지배구조 순위도 3위에 올랐다.
대만 상장기업의 시가배당률은 연 4.6%로 한국의 2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대만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 비중은 2001년 16%대에서 2017년부터 40%대로 상승했다. 외국인과 기관의 주식 시장 참여율도 지난 2013년 전체 15.3%에서 지난해 30.6%까지 2배로 뛰었다.
지난해부터 모든 상장사에 전자투표 도입을 의무화한 가운데 주주총회 참석 지분 대비 전자투표 지분 비율은 지난해 기준 60.5%까지 올라왔다.
여기에 지배구조를 평가해 높은 점수를 받은 상위 20% 기업 명단을 공개하는 제도는 상위권에 들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을 유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주친화 기업일수록 상위 20% 명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같은 성과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면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만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몇 년도까지는 어떻게 하겠다. 특별히 이것은 법을 바꿀 것이고, 이것은 거래소 규정을 바꿀 것이다. 이런 예측 가능한 제도 개선책을 내놓고 있어서 시사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부와 기업, 시장의 건강한 견제와 협력"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만 증시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그 어디에 내놔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성숙해졌다. 자본시장이 기업의 자금조달과 투자자의 자산증식이라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면서 경제 전체의 선순환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상장기업의 가치를 높이자는데 동의 하지 않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만의 사례처럼 정부가 문제의 이유를 찾아 해결방안을 찾아 제시하고, 기업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면 그리고 투자자들이 이들의 변화를 기다리고 감시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nt)'는 사라질 것이다. 거창한 계획이나 제도도 중요하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한 끊임없는 소통과 설득의 '소프트 파워'가 대만 증시 선진화의 숨은 비밀일 것이다.
금융투자업계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은 ROE(자기자본이익률)이 굉장히 낮다"며 "이는 현금이나 필요 없는 유휴자산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 투자자들과 얘기를 하면 기업이 투자를 안 하고 현금을 쌓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디스카운트'가 아니라 '코리아(제도,인식,관행)'가 문제라는 말을 최근 자주 듣게 된다. 어렵사리 만든 '코리아 프리미엄(Korea Premium)을 기회를 건강한 견제와 협력으로 꽃 피우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