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0개월째 계속되는 가운데, 반러 전선을 구축한 미국과 유럽연합(EU) 사이에서 균열음이 나오고 있다고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전쟁의 여파로 유럽 경기는 침체에 빠진 반면, 에너지 수출국인 미국은 천연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의 혜택을 보고 있고 무기 수출도 크게 늘었음에도 오히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시행해 동맹국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폴리티코는 EU 외교관 등의 인터뷰를 통해 조 바이든 미 행정부에 대한 유럽 각국 수뇌부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의 EU 고위 당국자는 이 매체와 인터뷰에서 "냉정하게 본다면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국가는 미국"이라면서 "미국은 많은 EU 국가에서 여론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유럽 각국은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값싼 러시아 에너지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까닭에 러시아가 가스관을 틀어쥐고 공급을 줄이자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물가가 앙등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유럽은 미국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대폭 늘렸지만, 미국 내 판매가의 4배에 이르는 비싼 가격을 부담해야 해 불만이 큰 상황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산 천연가스 가격이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했고, 독일 경제부 장관은 미국 정부가 에너지 가격 안정을 돕기 위한 `연대`를 보일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느라 유럽 각국의 무기고는 비어가고 있는데, 결국 이를 다시 채우는 것은 미국산 무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양측 갈등의 소지가 될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현재까지 152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의 무기와 장비를 제공했고, EU 역시 80억 유로(약 11조원) 상당의 원조를 했다.
이처럼 누적된 유럽의 불만이 폭발한 결정적 계기는 미국이 IRA를 시행해 유럽 산업계를 벼랑으로 내몬 것이었다고 폴리티코는 진단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유럽의 기업활동 여건이 악화한 상황에서 미국이 막대한 보조금으로 기업투자를 싹쓸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건 동맹국의 등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EU 당국자들의 시각이다.
EU 각국 장관과 외교관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의 경제정책이 유럽 동맹국에 미칠 영향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는 데 특히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실제, 이달 중순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 지도자들이 제기한 미국산 LNG 가격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EU 고위 당국자는 말했다.
유럽 각국은 IRA 시행을 계기로 미국과 무역전쟁에 들어갈 가능성을 열어둔 상황이다. 25일에는 브뤼셀에서 EU 27개국 무역장관이 참석하는 무역분야 회의를 열고 미국에 `동등 대우`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유럽의 공식적 반대에도 IRA와 관련해선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폴리티코는 `IRA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워싱턴은 여전히 우리 동맹인가`라는 한 EU 외교관의 발언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갈등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그토록 기다려온 서방 동맹국간의 균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