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고향생각>으로 20만 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시인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던 이상훈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아주 높다란 그리움>을 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50년 가까이 된 대학 시절부터 누런 갱지 노트에 빼곡히 담아온 시들에 근작 몇 편을 보탰다. 어리숙하지만 순수했고 고달팠지만 열정으로 가득했던 이삼십대 시절의 순정이 그대로 담긴, 청춘의 자화상이며 비망록이라 할 수 있는 시편들이다. 사는 일에 경황이 없어 마음 두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먼지를 뒤집어쓴 채 튀어나온 상자 하나. 그 안에 담긴 누렇게 변색된 몇 권의 노트를 찾아낸 저자는 마치 오래된 유적을 발견한 듯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유물을 발굴하듯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컴퓨터에 옮겼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젊은 날은 몸부림의 연속이다. 이 시기에 쓰인 시들은 동 세대의 공통 분모였던 가난, 암울한 시대의 획일적 사회 분위기, 현실의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여지없이 실패하는 사랑 등으로 온통 얼룩져 있다. `생각마저 질식시키는 무한 반복의 일상`(비상의 꿈)의 지배 속에서 `어둠 속에서 끄적이는 이 마음의 격랑에도 진실은 있는 것일까`(이 길에도 끝이 있다면), `숨통을 조여오는 이 완고한 시절/ 질주하다 보면 마침내 이륙할 수 있을까`(추락의 자유)하고 회의와 희망은 뒤섞이고 `모자람 없는 계절에 헐거운 육신을 움직여/ 허수아비는 고독의 춤을 춘다`(허수아비의 춤)처럼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허수아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직장에 자리를 잡고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 결혼하고 첫아이를 만나고 얼마쯤 지난 시점에 이 노트는 상자에 담긴 채 구석에서 구석으로 이어지며 어둠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중장년에 이르면서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고 약간의 여유도 누려보는 사이에 혼돈과 고난의 일기 같았던 시편들은 점차 화해와 희망으로 변해가며, 삶에 대한 관조와 통찰이 담긴다.
`삶은 제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 때/ 비로소 인생이 보인다`(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나는 홀로 피었다 지는 겨울꽃이 되련다/ 고독해도 외롭지 않은`(겨울꽃), `인생은 바람과 같은 것/ 스치기만 할 뿐/ 흔적 없이 사라져/ 인생은 아름답다`(바람), `눈물이 먼지처럼 우주를 떠돌다가/ 그리움으로 뭉치면 우박으로 쏟아집니다`(누군가 보고 싶을 때) 같은 시구 속에 불안과 갈등의 시간들을 살피고 갈무리해 희망으로 싹트게 하는 긍정의 빛이 드러난다.
무릇 시인은 눈물을 거름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눈물을 부정하지 않고 가슴속에서 삭히고 삭혀 마침내 꽃을 피워내는 사람들이다. 고난을 회피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여 빛으로 승화시켜 내고야 마는 사람들이다. 분노하되 저주로 기울지 않고 상처투성이여도 불구가 되지 않으며 끝내 희망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고독해도 외롭지 않은`(겨울꽃) 같은 역설은 그래서 가능하다. 고난의 수용과 삭힘, 승화의 여정이 담박하게 담겨 있는 시집이다.
방송계 `스타 PD` 출신인 저자는 교수와 영화 감독, 뮤지컬 연출가 그리고 소설가로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특히 첫 장편 소설 <한복 입은 남자>를 비롯해 <제명공주>와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등 히트작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역사 미스터리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런가하면 세 번째 장편 <김의 나라>로 제16회 류주현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저자는 단 한 번 시인이란 직함을 써본 적 없지만 인생에서 늘 시와 함께 해 왔다고 말한다. 솔직한 감정과 사유의 기록으로서, 시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생의 대변자로서, 삶의 증거자로서 내 안의 시인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상훈 지음 | 파람북 펴냄 | 130*205│128쪽│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