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NN방송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자국의 정치 체제에 실망하고 암울한 미래에 희망을 잃은 러시아인들이 자국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고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구글 이용자들이 찾은 검색어 추이를 보여주는 구글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몇 주간 이 문장을 검색한 건수가 최근 10년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달 초 러시아에서 `이민`이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검색량도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지난달 중순 대비 4배로 뛰었다.
`여행 비자` 관련 검색량은 2배로, `정치적 망명`의 경우 5배가 넘게 치솟았다.
CNN은 이런 데이터와 항공 운행기록, 전문가 분석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러시아인의 `엑소더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국민을 탄압하고 이웃 국가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불안한 행보와 이에 따른 국제적 고립 등 어두워진 미래를 견딜 수 없는 러시아인이 늘었다는 설명이다.
검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호주·터키·이스라엘·세르비아·아르메니아·조지아가 주요 목적지로 거론됐다고 CNN은 전했다.
이 가운데 조지아는 이민에 큰 비용이 들지 않고 러시아 국적자는 비자도 쉽게 발급받을 수 있다. 그런 만큼 실제로 최근 러시아인의 입국자 수가 급증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지아 내무부에 따르면 개전일인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16일까지 러시아인 3만4천명이 들어오고 1만7천800명이 나갔다. 총 1만2천600명가량이 순유입된 셈인데, 이는 2019년 동기 대비 14배나 많다.
CNN은 비행기 항로 추적사이트 `플라이트트레이더24` 자료를 분석해 최근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이스라엘로 향하는 비행편도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이달 6일 하루에만 아르메니아행 운항이 34회나 있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최근 카자흐스탄이나 이스라엘행 비행편도 50%가량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외국행 행렬은 개전 이후 현 정권하에서는 국가 전망 자체가 비관적이라는 판단이 국민 사이에서 확산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조지아 내 러시아 관련 비영리단체 `자유러시아 재단` 수장 에고르 쿠롭테프는 특히 인권 운동가나 정치권 인사들이 현재 신변 위협을 느끼고 탈출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싱크탱크 카네기모스크바센터의 선임연구원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이런 정치적 압박 외에 러시아 사회가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보거나 자식이 징집될 것으로 우려하는 가정도 이주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반전 시위에 참가했던 20대 여성 베로니카(가명)도 이런 이유로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시위 참가 후 경찰이 시베리아에 있는 부모 집까지 찾아와 협박했다고 전하고 관영 언론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다수 국민의 모습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베로니카처럼 탈출을 원하는 러시아인에게는 선택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침공 이후 각국이 러시아 노선을 막았기 때문이다. 개전 후 며칠도 안 돼 영국, 독일, 핀란드 등 37개국 항공사가 러시아 노선 운항을 제한했다고 CNN은 전했다.
실제로 플라이트트레이더24에 따르면 전쟁 전 210개가 넘는 항공사가 러시아를 오갔지만 이달 초에는 그 수가 90개 미만까지 줄었다.
베로니카는 친구와 함께 외국행 비행편에 벌써 2천500달러(약 300만원)를 썼지만 계속 결항됐고 이젠 환불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라고 토로했다.
러시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입을 막고자 2020년 3월 30일부터 육상 국경을 전면 폐쇄해 국제선 항공편을 통해서만 제한된 통행을 허용해왔다.
30일부터 카자흐스탄과 육로 통행이 허용되긴 했으나 아직 여러 국경이 잠겨 있어 비행편을 구하지 못하면 출국이 어려운 실정이다.
베로니카는 "지금 러시아를 떠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비행기표가 있다고 해도 너무 비싸다.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CNN은 "현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국외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앞으로 수개월, 수년 간 러시아 사회에서 변화가 스며들기는 어렵게 됐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