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10년, 2020년대를 앞두고 지난 10월 초 이후 끌어왔던 미·중 간 무역협상 1단계 합의안이 공식화됐다. 세계와 한국 경제로 봐서는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양국 간 무역 마찰이 모두 끝나는 ‘빅딜(혹은 메가 빅딜)’은 아니다. 경제패권 다툼의 속성 상 영원히 불가능할 수 있는 타협을 향한 첫 걸음일 뿐이다.
미·중 간 1단계 합의는 ‘국익’ 이상으로 수세에 몰렸던 시진핑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익이 감안된 결과라는 점에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시진핑 주석은 경기 침체로 정치적 입지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바오류’를 지킨 지난 3분기 성장률은 인위적인 부양책이 없었더라면 5% 초반대로 떨어졌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미국과 무역마찰 타결 등과 같은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제3의 천안문 사태’와 ‘시진핑 축출설’이 팻 테일 리스크(fat tail risk·가능성이 높은 꼬리 위험)로 우려돼 왔다. 지방경제 침체로 지방은행 파산이 잇달아 발생하는 과정에서 국경 지역을 시작으로 높아지는 인민의 경제고통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 1단계 합의안에서 농산물 구매, 위안화 절상 등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민원을 대폭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중국과의 1단계 합의안이 절실했다. 지난 7월 플로리다 출정식 이후 조 바이든·버니 샌더슨 등 유력 민주당 후보와의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처럼 취임 이후 지난 3년 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미국 국민의 표심을 얻을 만한 확실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4차 탄핵설이 공식화된 지난달 이후에는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일한 버팀목인 경기와 증시도 중국과의 무역마찰 타결 이상으로 확실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책임을 맡고 있는 재정정책은 대선 정국에 들어간 상황에서는 증세를 통한 재원 조달은 불가능하다. 적자 국채를 통한 재원 조달은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국채 발행→국채금리 상승→민간수요 감소)로 경기부양 효과가 적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제롬 파월 의장도 비협조적이다. 내년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올해 마지막 Fed 회의에서 현 금리수준인 1.5∼1.75%를 오랫동안 유지할 방침을 밝혔다. 대선이 치러질 내년 11월까지 한 차례 금리인하도 힘들 것이라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BOJ)처럼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뜨려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는 너무 다르다.
‘스트롱 맨’, ‘정치꾼’, ‘전파 탐지기형 인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시진핑 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은 1단계 합의안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보다 민감 사안을 담는 단계별 합의를 추진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분명한 것은 ‘경제패권 다툼’인 미·중 간 무역마찰은 영원한 타결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미·중 간 무역협상 1단계 합의를 계기로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3년 간 보여준 트럼프 정부의 보호주의 정도는 ‘역대 최고’로 평가된다. 1930년대 대공황을 야기시킨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스무트-홀리법 탄생)’에 비유될 만큼 ‘극단적 보호주의’로 흘러왔다.
첫째, 미국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부담과 책임만 지는 국제규범과 협상에 대한 우선 순위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세계무역기구(WTO)와 범태평양경제협의체(TPP) 탈퇴 의사, 파리 신기후 협상 불참 통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혹은 폐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국가별로는 무역적자 확대 여부에 따라 이원적 전략(two track)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대미국 흑자국에게 성장과 고용을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이 때문에 무역적자 확대국에 대해 통상압력을 가해 시정하고, 다른 국가와는 공존을 모색하는 ‘차별적 보호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통상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종전과 다른 점이다. 반덤핑관세, 상계관세 등 WTO 규범에서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수단 뿐만 아니라 자국법에 근거한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다. 심지어는 새로운 상호 호혜세를 부관한다든가 미국 의회를 거치지 않고 행정명령으로 발동할 수 있는 슈퍼 301조까지 동원한 태세다.
넷째, 통상정책을 다른 목적과 결부시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미국 통상법 232조에 근거해 통상을 안보와 연계시킨다든가, 대북한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국에 대해 집중적으로 통상압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 등 해당 국가가 트럼프 정부의 통상정책에 쉽게 대처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압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출범 이후 3년 동안 미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극단주의 보호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좀처럼 줄어들고 있지 않다. 내년 11월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연임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트럼프 정부의 네 가지 통상정책의 특징에서 보듯이 규범과 원칙이 무너졌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힘들다.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처리기구(DSB)에 제소하는 등의 대책을 발표하고 있으나 확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확정된다 하더라도 트럼프 정부가 따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트럼프 정부와 통상마찰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근본 원인부터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다. 트럼프 정부의 한국에 대한 통상압력은 궁극적으로 중국을 지향하는 만큼 우리의 대외정책이나 남북 관계 등을 풀어갈 때 미국과 중국 간 중간자로서 ‘균형’을 잃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응방식도 미국의 통상정책 기조변화에 맞춰 ‘옴니버스 방식’으로 바꾸는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통상정책을 남북 관계 등의 다른 정책과 분리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나 트럼프 정부가 다른 목적과 연관시켜 통상정책을 추진하는 움직임과 맞지 않아 의외로 효과가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통상관련 콘트롤 타워를 강화하는 문제도 시급하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