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1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 추진 보류를 발표한 것은 `100만 시위`로 표출된 홍콩 민의 앞에 `백기`를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2일 홍콩 시민 수만 명이 참여해 격렬하게 벌어졌던 입법회 주변 시위 이후에도 그가 법안 추진 강행 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것에 비춰보면 사태의 급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급반전을 끌어낸 일등 공신은 바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향한 홍콩 시민의 열렬한 의지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일 송환법 반대 시위에 무려 100만 명이 넘는 홍콩 시민이 참여하면서 분위기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당초 주최 측 목표인 50만 명의 두 배에 달하는 홍콩 시민이 모여 `반송중(反送中·범죄인 중국 송환 반대)`을 외쳤고, 그 열기는 12일 입법회의 송환법 2차 심의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12일 수만 명의 홍콩 시민이 입법회 건물 주변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 저지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 등을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의 강경 진압은 가뜩이나 좋지 않던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고, "떼를 쓰는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를 망치게 된다"는 캐리 람 장관의 `어머니론` 발언은 불타오르는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9일 시위를 주도한 재야단체 연합 민간인권전선이 16일 시위에서 100만 명을 훌쩍 넘는 시민들이 모일 것이라고 자신한 것도 이러한 여론의 흐름을 읽은 것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일 시위 참여자의 30%가 거리시위에 처음 나왔다 밝혔는데, 이러한 `시위 신참자`는 16일 시위에서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홍콩 경찰 병력은 3만 명에 불과해 1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모이면 사실상 통제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거리 민주주의`의 힘이 이날 홍콩 정부가 `백기`를 들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캐리 람 행정장관이 물러설 수밖에 없도록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그의 지지 기반인 친중파와 재계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캐리 람 행정장관 자문기구인 행정회의 버나드 찬(陳智思) 의장과 전직 관료, 입법회 의원 등 친중파 진영에서는 지난 12일 시위 이후 범죄인 인도 법안을 연기하고 시민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전직 경제장관, 전직 정무장관, 전직 보안장관 등 전직 고위 관료와 전직 입법회 의원 22명은 연대 서명한 서한을 통해 현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홍콩 의회인 입법회 전체 의석 70석 중 친중파는 43석가량을 차지해 과반수에 달하지만, 친중파의 이탈이 본격화한다면 법안 표결에서의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된다.
더불어 친중파의 근간을 이루는 재계에서 법안 추진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른 것도 캐림 람 장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번 법안에는 중국 본토에서 발생한 범죄와 관련해 중국 법원이 홍콩 내 자산의 동결과 압류를 명령할 수 있는 조항이 담겼다.
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하고 투명한 금융 중심지를 자처했던 홍콩과 이를 만끽했던 홍콩 부자들에게 이는 날벼락과 같은 얘기였다.
한 홍콩 재벌은 로이터통신에 "홍콩 씨티은행 계좌에 있던 돈 중 1억 달러 이상을 싱가포르로 옮겼다"며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홍콩 재벌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홍콩 시장을 떠날 경우 동아시아 금융 중심이라는 홍콩의 지위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통과 시 홍콩 국내총생산(GDP)의 최소 30%에 충격을 줄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홍콩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아론 하리레라 홍콩총상회 회장은 "대규모 시위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대한 대중의 우려를 나타낸다"며 홍콩 정부의 대화를 촉구한 것도 이러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홍콩 정부의 정책을 사실상 좌우하는 것이 중국 중앙정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날 발표를 결정한 것도 중국 지도부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빈과일보 등은 홍콩 업무를 총괄하는 한정(韓正)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홍콩과 인접한 선전(深천<土+川>)에 직접 내려와 대책 회의를 했으며, 전날 밤 밤 캐리 람 행정장관에게 법안 연기를 지시했다는 소문을 전했다.
이는 이날 송환법 연기 결정이 중국 최고 지도부의 직접 결정으로 이뤄졌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사실 그 선례도 있다.
지난 2003년 7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해 홍콩 시민 50만 명이 시위를 벌였을 때도 중국 최고 지도부 중 1명이 선전에 와서 대책 회의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홍콩 정부는 국가보안법 추진을 철회했다.
중국 지도부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이는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동을 앞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부담을 최대한 덜려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 맞설 우방을 찾기에 힘겨운 상황에서 홍콩 송환법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중국은 골치를 썩여야 했다.
미국은 물론 영국, 유럽연합(EU) 등까지 송환법 강행을 비판하고, 심지어 송환법 문제의 당사자인 대만마저 범죄인 인도를 거부하면서 중국은 법 추진의 명분을 잃고 궁지에 몰렸다.
홍콩 정부는 지난해 2월 대만에서 임신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망친 홍콩인의 대만 인도를 위해 이 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민의를 무시한 법안 추진은 원치 않는다며 범인 인도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고 무역전쟁에서 국제적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정세 판단이 송환법 추진 연기라는 `고육지책`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콩 재야단체와 야당은 이날 발표에도 "법안이 완전히 철회될 때까지 항의 시위를 계속하겠다"며 16일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검은 대행진` 시위를 열겠다고 밝혀 여진을 예고했다.
하지만 캐리 람 장관이 이날 법안 철회는 아니라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대중의 의견을 듣는 데 있어 시간표를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법안이 사실상 무기한 연기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친중국 성향인 홍콩 동방일보는 "2003년 국가보안법 추진이 50만 명 시위로 무산되고, 2012년 도덕·국민교육 강화가 12만 명 시위로 무산된 전례가 있다"며 "법안은 `용두사미`가 되는 형국"이라고 비판한 것은 송환법 추진이 사실상 흐지부지될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