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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첫사랑, 레노버 ThinkPad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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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본인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타는 차의 가격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브랜드, 차종, 연식과 연비, 몇 인승인지부터 옵션, 구매 방법 등 차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이 그 사람의 가치관부터 가족 관계까지 유추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는 된다.
자동차뿐 아니라 노트북도 마찬가지다. 삼성, LG, 애플, 델, HP,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후지쯔, 한성, MSI, ASUS, 에이서 등등 제조사도 다양하고 제조사별 라인업까지 치면 무궁무진하다. 수많은 선택지 중 당신이 산 노트북은 무엇인가. 아기가 돌잡이하듯 우연히 손에 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노트북을 쓰는지 보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인다. 보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오늘 할 이야기는 레노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씽크패드(ThinkPad)에 관해서다.


못 잊을 첫사랑의 손맛
현재 `씽크패드 마니아`들은 모두 레노버 노트북을 사용하지만, 이들은 제조사인 레노버를 종종 `적폐 세력` 취급한다. 레노버 것을 쓰면서 레노버를 욕하는 심리가 도대체 뭐냐고? 2005년, IBM의 PC 사업부를 인수한 뒤 2013년 2분기부터 HP와 DELL을 제치고 전 세계 PC업계 1위를 차지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은 레노버(2017년에는 2위, HP가 1위). 씽크패드 마니아들이 레노버에 섭섭함을 내비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키보드` 때문이다.
씽크패드의 시작은 1992년 IBM이 업계최초로 TFT 디스플레이를 적용한 700C를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Think는 당시 IBM 직원들의 모토였다. 판매가격은 대당 4,350$로, 당시 환율기준 340만원이었다. 당시 티코 최고급형 가격이 359만원이었으니, 어휴.
이후, 95년 북미 총괄 책임자인 팀 쿡(그래, 애플의 그 팀 쿡)이 당시 가장 큰 LCD스크린인 10.4인치라는 제약에도 풀사이즈 키보드를 지시했으나, 팀 쿡과 팀원의 퇴사로 출시가 지연되고 있었다. 엔지니어 John Karidis는 버터플라이 키보드를 적용해 해결했고, 그 701C는 뉴욕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뉴욕근대미술관에 갈 정도로 당시부터 고집스럽게 지켜온 `풀사이즈 7열 키보드`는 2012년 X220과 T420 등을 끝으로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 7열 키보드의 키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내 표현력이 부족하니 타인의 입을 빌려 보충하겠다. 소설가 김중혁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7열 키보드의 키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씽크패드 노트북을 가장 좋아한 이유는 키보드의 촉감 때문이었다. 어찌나 단단하고 탄력이 좋은지 정말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내가 하나의 키를 누르면 키보드는 곧장 튀어 오르며 어떤 대답을 하는 듯했다." 근데, 이 문장도 한참 부족하다. 그럼 뭐냐고?
7열 키보드의 키감을 기계식 키보드로 비유하자면, 청축의 경쾌함, 갈축의 부드러움 그리고 적축의 조용함, 이 삼각지 중간의 어디쯤이다. 감이 오시는지. 일 때문에 노상 노트북을 끼고 다니기에 노트북 키보드는 중요하다. 앞으로 한평생 7열 키보드 노트북을 쓸 요량으로, 깨끗한 X220과 T420을 미리 구매해서 창고에 쟁여놓았을 정도다. 순전 키보드 때문이었는데 이 7열 키보드를 레노버가 날려버린 것이다.


손에 익은 그녀와의 재회

이런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소식이 있다. 씽크패드 설립 25주년 기념 한정판 모델, TP25의 발매 소식. 참고로 이 물건은 한국에서 구매할 수 없다. 미국 공식 홈페이지에서 1,899US$에, 홍콩에선 15,888HK$에 판매 중이다(현재 환율 기준 약 220만 원). 세금과 배송료를 포함하면 230만 원가량 할 거다. 기자는 네이버 카페 `TPHOLIC.KR`에서 한국레노버가 진행한 추첨 구매 이벤트에 응모했다. 평생 쓸 운을 몰아서 쓴 건지 3명 중 1명에 당첨돼 TP25를 190만 원에 구매했다. 한국레노버 만세, 만만세!

CPU는 i7-7400U, RAM은 16GB에...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차피 거의 모든 사양이 지난해 3월에 출시한 T470과 동일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단 하나의 차이점. 바로 2012년 이후로 사라진 7열 키보드의 귀환이다. 이건 흡사, 6년 전 헤어진 첫사랑이 변치 않은 미모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기분이다.
7열 키보드를 첫사랑처럼 못 잊는 마니아는 수없이 많다. 이유는 키보드 사이에 박힌 트랙 포인트 `빨콩`(공식명칭 마젠타)의 손맛이라든지, 특유의 쫀득한 키감 외에도 다양하다. TPHOLIC 회원 한명은 그 이유를 "나를 위한 배려가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A를 누르다 실수로 CapsLock을 누르면 오타와 변환이 함께 되어 버린다. 씽크패드의 7열 키보드는 CapsLock 오른쪽에 홈이 파여서 바로 옆에 배치한 A 키와 감각적으로 완벽하게 구분해 손 위치를 더 잘 잡아준다. 하단 Ctrl, 윈도, Alt 키 등은 음각과 양각을 번갈아 배치해 손끝 감각만으로 키보드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듯 칠 수 있게 한다. 다른 키보드처럼 Fn 키와 윈도 키를 잘못 누를 일이 없다.
가장 큰 가치는 데스크톱 키보드에서 제공하는 대부분의 기능 키를 노트북에 모두 집어넣은 것에 있다. 한 예로, 다른 키보드들이 Insert-Delete-Home-End-Pgup-Pgdn, 이 여섯 키를 한 줄에 세워놓는 것과 달리, 씽크패드의 7열 키보드는 데톱 키보드와 같은 2×3형태로, 그것도 방향키와 같은 축에 배치한 것이 대표적. 그리고 F1~F12 키는 4개씩 분리해 쉽게 인지하게 했다. 우측 Shift 키도 사이즈를 줄이지 않아서 타이핑이 쉽다. 거기에 빨콩이 더해지니 화면을 위아래로 스크롤하거나 커서를 마우스로 움직이기 위해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아도 된다. 이 모든 배려는 결정적 생산성 차이를 가져온다. 탁탁탁.


그 시절 첫사랑을 만나듯

IBM이 완벽에 가깝게 만든 7열 키보드를 레노버가 차버린 이유는 뭘까? 의견은 분분하다. 개발자 인터뷰를 보니 "시장 조사한 결과, B2B 고객 대상인 IT 관리자의 세대가 젊어지고 있고, 그들은 타사 제품인 6열 키보드에 더 익숙하다"고 그 배경을 밝히고 있었다.
일본 도시락 상자에서 영감을 받은 블랙과 레드의 각진 네모 디자인, MIL-SPEC을 통과한 내구성과 안정성. 예전에는 획기적이었을 여러 기능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깔 게 없진 않다. 그래도 씽크패드에 깊은 애증을 느끼는 오랜 팬 입장에서 이 명작이 퇴색되는 게 아쉬웠다. 이 키보드 하나만으로도 매력적이던 씽크패드는 세월이 흘러 젊은이들의 손에 맞게 변화했다. 기어를 살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건 기능이다. 그러나 내가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건 그 기어가 나에게 주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다. 25주년 한정판 씽크패드의 7열 키보드는 씽크패드와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 시절 나를 일깨웠다.
오랜만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씽크패드의 탄력이 좋은 키보드와 대화를 나누는 기쁨이 새삼스러웠다. 2013년부터 생산한 씽크패드에도 빨콩은 있었으나, 어딘지 대답 없는 여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만난 TP25는, 나는 변했지만 너만은 변치 않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나란 놈 앞에, 첫사랑이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난 듯했다. 우리 다시 만날래?


- 7열 키보드만 써보고 싶다면?
장점도 많지만 가루가 되도록 깔 것도 많은 레노버의 씽크패드. 어차피 안 써본 당신한테는 소귀에 경 읽기다. 그렇다고 230만 원을 덜컥 지르긴 싫고, 직구는 더더욱 자신 없는 분을 위해 소개한다. 오늘도 중고로운 평화나라에서 SK-8845와 SK-8855를 검색하면 `울트라나브`라는 외장 7열 키보드가 검색될 거다. 거의 대부분은 나오자마자 팔린다. 상태에 따라 5만 원 내외. 이미 단종된 제품이니 보는 즉시 쟁여놓도록.


- 염색되는 샴푸, 대나무수 화장품 뜬다
한국경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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