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한 방이었다. 배우가 자신과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나 대중에게 칭찬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 배우 김래원은 인기리에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펀치’를 통해 연기력을 입증하며 시청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펀치’는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라인에 휘몰아치는 전개, 감탄을 자아내는 극적 장치까지, 내실 있는 드라마였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량감을 주는 시원한 복수와 정의실현, 가족애를 그려낸 깔끔한 마무리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김래원은 ‘펀치’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검사 박정환을 맡아 극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배우로서 다시 집중조명 받고 있다.
“‘펀치’가 끝나고 이제 밤과 낮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못 돌아오고 있어요. 감독님이 드라마가 무거울까봐 중학생처럼 연기를 해달라고 주문하셨어요.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저를 믿어주셨죠.”
박정환은 개천에서 난 용처럼 검찰이 됐고,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헤쳐 온 상관의 사냥개가 되길 자처했다. 간신히 이기는 방법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에 종양이 들어앉아 있어 살날이 3개월 남짓 남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다.
“복잡하기 보다는 오히려 심플하게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어요. 영화 ‘강남 1970’을 마치고 와서 헤맸죠. 사실 그것 때문에 ‘연기가 이상하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어떤 역할을 맡아도 사람이 우연히 찍히는 모습으로 나오게 하자’고 생각했어요. 박정한의 무게와 진정성을 앞에서 만들어 놓은 게 후반부 촬영은 쉬웠어요.”
박정환은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가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감춰놓은 인물이다. 초반에는 목표를 위해 전 부인도 내치는 냉혈한이었다. 복잡한 설정을 지닌 캐릭터임에도 김래원은 섬세하고 몰입도 높은 연기로 비극적인 캐릭터를 구현했다.
“박정환이 그리 떳떳한 입장이 아닌 것은 맞아요. 시한부가 안됐으면 이태준과 똑같이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깨끗함을 유지해왔던 하경(김아중)이도 딸 예린(김지영)이를 건드리니까 원리원칙을 어기게 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게 말을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대본이 어려웠어요. 두어 번은 들여다봐야 분석이 됐어요. 그런데 다 말이 되고 너무 좋았어요.”
박정환은 썩 멋있는 역할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불쌍해 보일 수 있는 시한부 삶을 사는 남자였지만, 박경수 작가의 필력을 통해 살아났다. 말의 향연이 펼쳐지는 대사가 한 줄 한 줄 압권이다. 박경수 작가의 멋진 대사와 카리스마 있는 김래원의 연기가 박정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포인트다.
“작가님과 도중에 한번 잠깐 통화를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해줘서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대본이 너무 늦게 나오는 게 문제였어요. 이 대본을, 이 좋은 대사들을 더 잘 해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화가 났어요.”
박정환은 아픈 티를 내는 것은커녕, 순간순간 벽에 막히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좌절할만한 순간에도 놀랍도록 평정심을 유지한다. 그는 이태준(조재현) 검찰총장과 윤지숙(최명길) 법무장관을 끌어내리려고 돌진하지만 번번이 무릎이 꺾인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으로서는 너무 힘든 것 아닐까.
“내 딸 예린이를 괴롭히잖아요. 내 아이의 엄마를 옥살이시켰잖아요. 그리고 지금 이대로 무너지면 그들이 박정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테니까요. 박정환이 죽은 뒤 이태준이 영웅이 되는 것은 못 보겠는 거죠. 내 딸이 볼 교과서에 이태준이 영웅으로 나오는 건 안 되는 거죠.”
김래원은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은 박정환 역할에 충실하고자 무려 15kg이나 감량을 했다. 야윈 몸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뇌종양 환자의 외형을 완성했고,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는 캐릭터의 명석함을 드러냈다. 통증에 고통 받는 장면이나 시간의 흐름 앞에 처절해지는 모습, 딸 예린이를 향해 짓는 환한 미소 등은 그가 숨겨놓은 인간적인 면모였다. 시청자들이 어느새 박정환을 응원하게 됐다.
“영화 ‘강남 1970’을 촬영하면서 많이 뺐어요. 이후 ‘펀치’ 촬영을 하면서 극중 상황과 맞아 그대로 유지했어요. 그러다 후반부에는 너무 빠져서 막 먹었어요. 나이 먹으니까 식단관리도 하고, 예전보다는 쉽지 않았어요. 비주얼에 신경 쓰는 편이 아닌데 주위에서 ‘관리가 철저한 것 같다’고 칭찬해 해주시더라고요. 날씨가 추운데 쓰러지는 장면을 찍으면서 정말로 아파서 한의원에 다녀왔어요.”
김래원은 12년 만에 재회한 선배 배우 조재현과의 연기 대결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엄청난 시너지를 발산하는 케미를 자랑하며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인상적이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2003년 종영된 드라마 ‘눈사람’. 이후 12년 만에 ‘펀치’에서 만났다. 조재현은 검찰총장 이태준 역을 열연했다. 초반엔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한 편이 되서 각종 비리를 저지르더니, 한순간 서로를 공격하고 밟고 일어서려는 존재로 전락했다. 두 사람의 관계 변화와 그 과정에서 흐르는 긴장감 등이 극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극중 처음부터 두 사람이 의형제처럼 나왔는데,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더 잘 나왔어요. 조재현 선배님은 연기를 정확하게 던져 쫓아오게끔 이끌다가 제가 연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게 최고였어요. 선배님과 같이 연기하면서는 따로 혼자서 분석할 필요도 없었고 대사도 다 외우지 않았어도 술술 나올 정도였죠. (김)아중이는 선, 저는 악이었죠. 밥도 안 먹고 많은 얘기를 나눴고 중반 이후에 잘 맞춰 갔어요. 예린(김지영)이와도 너무 좋았어요. 농담 삼아 ‘예린아 네가 잘해야 드라마가 성공 한다’고 말했는데, 전혀 부담감도 안 느끼고 잘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펀치’ 방영 전 김래원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2011년 9월 터진 폭행사건 연루설, 2012년 초 개봉한 영화 ‘마이 리틀 히어로’의 예상치 못한 흥행 실패는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스트레스는 폭식으로 이어졌고 체중이 100kg 가까이 불며 굴욕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기우였고, 배우답게 오로지 연기로 승부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예전보다 연기를 넓게 한 것 같아요. 주변 인물이 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감독님과 관계도 너무 좋았어요. 지금은 형이라고 불러요.”
송아지 같은 눈매와 서글서글한 말투, 기대기 좋은 듬직한 풍채와 윤기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일본에서도 스타덤에 올랐던 김래원. 그는 ‘펀치’를 통해 다시 한 번 일본에서 한류스타를 꿈꾼다. ‘펀치’가 일본 한류 예능 전문채널 KNTV를 통해 오는 4월 4일부터 방영된다.
“‘한류스타’ 타이틀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요. 여론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제가 이민호, 김수현이 될 수는 없죠. 진정성 있는 배우로 남아야죠.”
김래원은 ‘펀치’를 통해 청춘스타에서 노련미 물씬 풍기는 배우로 거듭났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2003)나 ‘사랑한다 말해줘’(2004), 영화 ‘아이엔지(ing)’(2003) 등 일련의 로맨스물로 김래원을 기억했던 사람들에게, 2015년 연초에 그가 선보인 ‘펀치’는 터닝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