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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칼럼] ‘징비록’, 준엄하게 현재를 경계한 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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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대하사극 ‘징비록’이 현시대를 꼬집는 내용으로 주목받고 있다.(사진 = KBS)
[하재근 칼럼] ‘징비록’, 준엄하게 현재를 경계한 명장면

KBS ‘정도전’에 이은 대하사극 ‘징비록’이 시작됐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직후 서애 류성룡이 쓴 책의 제목으로, 미리 징계해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를 담은 말이다. 한 마디로 후대에 교훈을 주려 했다고 보면 되겠다. 드라마 ‘징비록’도 이런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주말 방송분에서 ‘징비록’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왔다. 왜구의 앞잡이 노릇을 해 감옥에 갇힌 반역자 사화동과 류성룡이 만났을 때, 사화동이 한 말이었다.

“그건 분명히 아시오, 어째서 나 같은 반민들이 생기는지 말이오. 양반님네들은 내지도 않는 조세를 우리네 같은 피죽도 못 먹는 놈들이 모두 떠안고, 녹봉 한 푼 없는 군역을 평생 이고 살아야 하고, 나오지도 않는 특산품을 공납하라고 목을 죄니, 도대체 이놈의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란 말이오. 이런 나라에 살 바에야 왜놈이 되든 되놈이 되든 뭔 상관이냐 이말이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네들 양반하고 왕이란 말이오.”

바로 이 대사에서 ‘징비록’ 작가의 문제의식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부자 권세가가 내지도 않는 세금을 왜 일반 서민이 내야하며, 사회지도층이 지지 않는 군역을 왜 일반 서민이 져야 하며, 특산품을 바치라고 목을 죄서 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느냐는 항변인데 여기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일단, 임진왜란이 닥쳤을 때 조선에 어떤 모순구조가 있었는지를 하나의 대사로 압축해서 표현했다. 군림만 하다 도망부터 친 양반과 그 밑에서 평생 수탈만 당하며 살아야 했던 서민들 사이의 모순 말이다. 이것으로 조선이 전쟁초반 왜 그렇게 쉽게 허물어졌는지가 일정부분 설명된다. 조선의 백성은 왕과 양반에게 충성을 바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사는 또, 향후에 류성룡이 어떤 개혁을 추진할 것인지를 예감케 했다. 전란이 벌어진 후 류성룡은 전공을 세울 경우 천인을 양인으로 올리고 벼슬까지 주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것은 부자들의 재산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천인, 즉 노비가 부자 양반들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천인이 양인이 된다는 건 부자 양반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 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사대부들은 반대했다.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일단 자기들 재산이 우선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사노비뿐만 아니라 양반까지도 군역을 져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총력체제를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조선의 가장 핵심적인 논란이 되는 사안은 대동법이다.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을 쌀로 바치도록 하는 개혁을 말한다. 여기에 양반지주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부자들이 저항했다. 류성룡은 전란 중에 공물을 쌀로 내도록 하는 개혁도 추진해 대동법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사화동의 대사를 통해 조선의 모순구조를 드러냄과 동시에 향후 류성룡이 어떤 개혁을 추진하면서 양반 기득권 세력과 대립하게 될지를 예감하게 한 것이다.



앞에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 것은, 이것이 단지 조선시대의 상황만을 전한 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현재를 경계하는 메시지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자보다 세금을 더 내는 서민, 사회지도층이 요리조리 피해가는 병역을 담당하는 서민. 요즘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말들 아닌가?

억대 연봉을 받는 고위 정치인의 아들이 건강보험료를 ‘0원’ 부담했다는 소식은 건강보험료에 허리가 휘는 많은 서민들을 탄식케 했다. 온갖 명목으로 서민들의 실질적 세금부담률이 상승하는 사이에 재벌의 세금부담률은 그렇게 오르지 않았다는 시사프로그램들의 고발도 국민을 허탈하게 했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만 하면 단골로 터지는 병역 의혹도 서민의 허탈감을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국민이 하나로 똘똘 뭉쳐 지금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때처럼 위와 아래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면서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선의 왕과 사대부는 사화동이란 반역자를 만들었는데, 지금의 우리 사회는 우리 서민들의 애국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권력과 재산에 비례하는 사회적 책임이란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권력 자산가는 누리기만 하고 책임은 서민만 지는 사회로 간다면, 우리는 조선이 당했던 위기를 똑같이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드라마 ‘징비록’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보인다. 좋은 사극은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재까지 담아낸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사화동의 대사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계하는 ‘징비록’의 미덕이 드러난 명장면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징비록’이 앞으로도 매서운 죽비로 과거를 일깨우고 현실을 경계하는 명작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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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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