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입만 열면 기가 막힌다고 했습니다. 충북 중원군 산골, 말 그대로 찢어질 듯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두 살 아래 남자 만나 결혼한 후 어찌어찌하다 서울로 왔다지요. 무작정 상경. 의지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돈 생기는 일 자리를 마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중에 쥔 것 적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지만 훤칠한 키에 수려한 이목구비, 언제나 느긋한 한량처럼 처신하던 남편만 믿고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보금자리부터 마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급한 대로 봉천동 고개 근처 판잣집에 월세 방 한 칸을 얻었지만 일 년이 되기 무섭게 세를 올려달라는 통에 몇 번이고 이사를 해야 했답니다. 그 와중에 아이 다섯 중 큰 아들을 잃었다지요. 설상가상, 힘들게 얻은 공사판 일용직으로 일하던 남편까지 몸져눕게 됐는데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 입에 풀칠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가족의 터전은 뒤로 밀리고 밀려 마침내 까치가 둥지를 트는 언덕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저 아랫동네, 소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게지요. 초저녁 별들의 인사를 가장 먼저 받고 하루의 첫 이슬 맺히는 이곳에서 삶을‘사는 게’아니라‘살아내야만’했습니다. 점잖고 유순하지만 악착스럽지 못했던 남편은 몇 년 안 돼 이승을 떠났습니다. 그때가 35년 전, 그녀 나이 마흔 둘이었지요.
상도동에서 봉천동, 다시 상도동으로 행정 구역이 바뀌었습니다. 생과 사도 언제 갈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야무지게 마음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됐을 터, 이때부터 그녀는 억척 아줌마로 통했고 독한 여자라는 소리도 듣게 됐다지요. 근처 공사장에서 주어온 벽돌 직접 얹어 방 두어 칸 더 만들어 세놓고 공장 식당 가리지 않고 벌이하러 나갔다 합니다. 어린 네 남매는 좁은 방에 누워 유년의 기형도 시인처럼 엄마를 기다렸을 테지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엄마 걱정」전문
글: 김홍조(한국경제TV 해설위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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