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는 수많은 클래식 명곡이 있지만, 오늘은 9월을 기점으로 새 시대를 맞은 뉴욕 필하모닉의 야심 찬 선곡으로 이 계절의 정취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의 교향곡 5번입니다.
ADVERTISEMENT
두다멜의 시그니처 레퍼토리 '말러 5번'
한국 공연계는 대부분 연초에 새 시즌을 맞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선 가을 학기처럼 9월에 시즌이 바뀌는데요.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가 새롭게 부임하는 것도 바로 이때 집중됩니다. '지휘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45)도 이달 초 LA 필하모닉에서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5년의 임기를 시작한 두다멜이 과연 어떤 작품으로 현지 관객을 매료시킬지 세계 클래식 팬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는데요.
두다멜이 무대에 올리는 작품 중 하나가 말러의 교향곡 5번입니다. 나뭇잎들이 단풍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뉴욕 센트럴파크와 인접한 링컨센터, 뉴욕필은 이곳 무대에서 오는 29일까지 말러 5번을 선보입니다. 두다멜은 자신의 시그니처 레퍼토리인 이 작품을 앞세워 다음 달 뉴욕필의 유럽 투어도 이어갈 예정입니다.
ADVERTISEMENT

이 작품은 말러가 장 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건강을 회복하던 1901~1902년에 작곡한 것입니다. 교향곡 1번 이후 말러가 약 13년 만에 다시 쓴 순수 기악 교향곡이기도 합니다. 말러의 앞선 교향곡 2번과 3번, 4번에는 기악뿐 아니라 성악 파트도 포함돼 있습니다.
작품은 '장례 행진곡'이라는 1악장 지시어에서 알 수 있듯 짙은 어둠에서 출발합니다. 트럼펫의 고독한 독주 팡파르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가을 특유의 쓸쓸한 공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인 5악장에 이르러선 태양이 찬란한 빛을 뿜어내듯 밝은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두다멜 시대를 맞이한 뉴욕필이 새 시즌을 힘차게 알리는 작품으로 제격인 셈이죠.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악장은 바로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입니다. 오직 하프와 현악기군만 편성된 이 악장은 한없이 부드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잔한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이 아름다운 악장은 말러가 사랑에 빠져있을 당시 작곡한 '가사 없는 러브레터'입니다. 1901년 11월, 한 저녁 모임에서 알마 신들러라는 여인을 처음 만난 말러는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떠올리며 이 음악을 써 내려갔습니다. 말러의 진심이 담긴 악보를 전달받은 알마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만난 지 네 달 만에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ADVERTISEMENT
낭만적 서사가 깃들었지만 특유의 고요한 멜로디 때문인지 이 악장은 추모의 선율로도 자주 연주됩니다. 1968년 레너드 번스타인은 존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남동생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이 악장을 지휘했죠. 한국에선 영화 '헤어질 결심'에 삽입된 것으로도 유명한 악장입니다.

"기쁨 절망 등 모든 감정이 녹아든 작품"
말러 5번은 두다멜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2004년 독일 밤베르크에서 열린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스물셋의 두다멜은 바로 이 작품을 지휘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에는 두다멜 자신도 몰랐겠지만, 1909~1911년 뉴욕필 음악감독을 맡은 말러의 뒤를 이어 뉴욕필을 이끌게 된 마에스트로의 역사적 순간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죠. 두다멜은 말러 5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ADVERTISEMENT
"대부분의 사람이 기억하는 건 '아다지에토' 악장입니다. 하지만 제게 중요한 건 그 악장이 전체 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죠. 장례 행진곡으로 시작한 작품이 절망의 2악장, 기쁨의 3악장을 지나 사랑의 아다지에토로 발전하고, 마침내 희망의 5악장에 도달하는 복잡한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 작품 안에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의 양극단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말러 5번 공연을 보러 당장 미국으로 떠날 순 없어도, 우리에겐 음원이 있습니다. 앞서 두다멜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말러의 교향곡 전곡(10개곡)을 녹음했는데요. 2024년 앨범에서 말러 5번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