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린에 펼쳐진 거대한 항해에 힘입어 3000년 전의 고전 <오디세이아>를 다시 펼쳐 드는 이들이 늘고 있다. 신과 인간, 시련과 귀환이 교차하는 장엄한 이야기가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준다. 주목하는 이들이 거의 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 영화는 인류가 오랫동안 몸에 지녀온 오브제, 즉 주얼리의 본질과 역할을 새롭게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무대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주얼리는 말없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사건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배우다. 페넬로페(앤 해서웨이)가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에게 건넨 ‘아테나 핀’이 대표적이다. 황동색으로 보이는 ‘아테나 핀’은 20년 만에 돌아온 오디세우스의 정체를 증명한다. 또 하나의 상징적인 주얼리는 안티노오스가 새끼손가락에 낀 핑키 링이다. 마치 이타카의 주인이 된 듯한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오브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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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서약이자 귀환의 열쇠, 아테나 핀
영화 속 핀에는 긴 옷을 입고 서 있는 아테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 몸을 따라 덩굴 혹은 뱀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선이 휘감으며 고대의 부적 같은 인상을 준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다. 트로이로 출정하는 남편의 손에 아테나 핀을 쥐여준 페넬로페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전사하지 말고, 명석한 지혜로 살아남아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염원이 담긴 생존의 부적이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품속에 남은 이 핀은 기나긴 방랑 속에서 그가 돌아가야 할 사람과 장소를 일깨우는 나침반이 된다.아테나는 베 짜기와 직조를 관장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페넬로페는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낮에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에는 다시 풀어내는 계책으로 구혼자들을 따돌렸다. 흩어진 실을 엮어 하나의 천으로 만드는 직조와 완성된 옷자락을 꿰뚫어 단단히 결속하는 핀은 아테나라는 하나의 신화적 뿌리에서 만난다. 오디세우스가 바다에서 지략으로 살아남았다면 페넬로페는 베틀 앞에서 지략으로 왕국과 가정을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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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 낯선 방랑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이 핀을 꺼내 보이는 순간, 장신구는 부적에서 증거로 변한다. 세월이 그의 얼굴과 몸을 바꾸었지만, 페넬로페에게 건넨 작은 핀은 두 사람이 공유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테나 핀은 오디세우스의 인식표였을 뿐 아니라 끊어진 듯했던 부부의 시간을 다시 하나로 여미는 귀환의 열쇠였다.

옷을 여미던 도구에서 브로치로
오늘날 핀과 브로치는 옷깃 위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장식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시작에는 ‘아테나 핀’처럼 생존과 실용이라는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단추와 단춧구멍이 쓰이기 이전인 과거 고대인들은 몸에 두른 양모나 천을 직선형 핀이나 ‘피불라(Fibula)’로 고정했다. 피불라는 바늘과 활 모양의 몸체, 바늘을 거는 걸쇠가 결합한 고정 도구로, 오늘날의 안전핀과 닮은 구조다.한 폭의 천을 어깨와 가슴에 고정해 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붙잡고 신체를 보호했다. 옷을 입는 행위가 인간의 신분과 존엄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핀과 피불라 역시 기능을 위한 도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청동과 철로 만든 소박한 형태로 출발해 금과 은으로 제작하고 정교한 문양과 보석을 더한 형태까지 진화했다. 재료와 세공이 점차 착용자의 지위와 부, 미적 취향을 말해주는 물건이 되었다. 피불라는 시대가 흐르며 조형성과 상징성을 갖춘 장신구로 발전해 오늘날의 브로치로 이어졌다.
이러한 기원을 떠올리면 영화 '오디세이'의 아테나 핀의 의미가 다가올 것이다. 고대의 핀이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붙잡았다면 페넬로페가 건넨 아테나 핀은 20년의 세월에도 풀리지 않은 부부의 서약과 기억을 단단히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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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겉도는 권력, 안티노오스의 핑키 링
아테나 핀과 극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장신구가 ‘핑키 링(Pinky Ring)’이다. 구혼자들의 우두머리 안티노오스(로버트 패틴슨 분)의 새끼손가락에서 번쩍인다. 오디세이의 의상 디자이너 엘렌 미로즈닉은 한 인터뷰에서 안티노오스를 화려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공작새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손끝에 자리한 황금색 반지는 이를 압축해 보여준다. 부와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기애와 오만을 드러낸다.반지의 윗면을 강조한 형태는 권력과 신분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시그넷 링을 떠올리게 한다. 시그넷 링(Signet Ring)은 윗면에 소유자의 이름이나 초상, 상징 등을 새긴 인장 반지다. 각인된 면을 밀랍이나 점토에 눌러 문서와 편지를 봉인하고 소유자의 신분과 권한을 증명하는 데 사용했다. 다만 고대의 인장 반지는 반드시 새끼손가락에 착용하진 않았다. 영화는 그런 반지를 안티노오스의 새끼손가락에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손의 가장 바깥에 자리한 금빛 반지가 술잔을 들거나 명령하듯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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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노오스는 이타카를 다스릴 명분도, 결단을 내릴 지혜도 없이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머물며 재산을 축내고 페넬로페와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 따라서 그의 핑키 링은 아직 갖지 못한 권력을 이미 소유한 듯 연기하는 허영의 표식이다.

영화 속 두 장신구는 이처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물과 사건의 진실을 드러낸다. 페넬로페의 핀은 오디세우스의 진짜 정체를, 안티노오스의 반지는 타인의 왕좌를 탐하는 그의 욕망을 폭로한다. 이들이 건네는 무언의 대사는 우리가 왜 여전히 주얼리에 매혹되는지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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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리의 가치는 캐럿의 무게나 표면의 광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옷자락을 붙잡던 고대의 바늘에서 출발해 사랑의 인식표이자 귀환의 열쇠가 된 아테나 핀. 수천 년이 지나도 우리가 여전히 주얼리에 매혹되는 것은 차가운 금속과 보석 속에서 한 인간이 끝내 지켜낸 사랑과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몸에 머물렀고, 어떤 시간을 견뎠으며, 누구의 기억을 품었는지가 주얼리의 가치를 더욱 깊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