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90년 묵은 수학 난제를 풀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채용의 필수 조건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연구와 교육이라는 양대 축이 AI의 도전을 받으면서 ‘대학 무용론’까지 등장했다. 김동원 고려대 총장은 “지금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대학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AI를 통제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인간 고유의 역량을 뜻하는 ‘인간지성(HI)’을 강조하고 있는 김 총장을 지난 17일 고려대에서 만났다.
▷AI가 수학계 ‘90년 난제’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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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수학이나 바둑처럼 아무리 복잡해도 기준이 정해져 있는 환경에서는 최고의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환경을 주면 달라지죠. AI에게 기업 이사회에 앉아 의사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면 얼마나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저는 여전히 AI가 ‘똑똑하지만 게으른 신입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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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처리 능력은 뛰어나지만 큰 비전을 세우거나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AI의 권한이 계속 강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AI 관련 기업의 수장들조차 기술의 역습을 우려합니다. 인류 멸망에 대비해 대규모 지하 대피 공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일리야 수츠케버 오픈AI 공동창업자처럼요.”
▷필요 없어지는 학문도 있지 않을까요.
“전혀요. 철학은 옳음과 책임의 기준을, 역사와 문학은 인간 삶의 맥락과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게 합니다. AI 시대일수록 이런 인문학적 성찰의 가치는 더 커집니다.”
▷인문학 교육을 강화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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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학기부터 전공과 관계없이 모든 학부생이 이수할 수 있는 ‘HI 기반 지혜와 실천’ 마이크로디그리를 운영합니다. △인성과 시민성 △소통과 협업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돌봄과 공존 네 가지 역량을 중심으로 13개 학과·전공이 참여해 23개 과목을 제공합니다. 기술을 잘 다루는 인재를 넘어 기술의 한계를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을 판단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함입니다.”
▷HI의 중요성을 체감한 계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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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사관계학회에 갔다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봤습니다. 생성형 AI가 활성화된 2023년 전후로 유럽연합(EU) 국가에서 나온 800만 개 채용 공고를 비교한 겁니다. 엑셀·워드 등 실무 기술 역량과 어학 능력을 요구하는 비중은 낮아지거나 비슷한 반면 리더십, 소통 능력, 설득력 등을 요구하는 비중은 높아졌습니다. AI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인간 지성’의 영역입니다.”
▷최근 연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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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 철학 수업을 찾아 듣곤 했어요. 돌이켜보면 제가 경영학 중에서도 노사관계학을 전공한 것은 인간의 존엄, 공정한 분배, 그리고 더 나은 공동체의 질서라는 철학적 고민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임 기간 3400억원의 기부금을 유치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한다고 얘기하기 전에 기부자나 기부 기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기업이 대학에 출연한 기부금을 재원으로 교수를 임용하는 기금교수제가 대표적입니다. 전력망, 디지털금융부터 아스팔트콘크리트 포장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이 원하는 기금교수를 선발해 주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확충한 재원을 어디에 투자했습니까.
“캠퍼스 전체가 ‘공사장’이 됐습니다. 자연계 중앙광장과 인문관을 비롯해 건물 6개를 신축하고 18개를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진행됐거나 진행 중입니다. 재임 기간 교원 492명을 신규 임용했습니다. 대학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는 인원이죠.”
▷세계 대학 평가 순위가 높아졌습니다.
“‘2027 QS 세계대학평가’에서 52위를 기록하는 등 역대 최고 순위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미국 예일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영국 케임브리지대, 중국 베이징대 등 글로벌 대학과의 연구 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 두 분을 석좌교수로 초빙했습니다. ‘글로벌 지식 네트워크’를 만들고 함께 인류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정부가 주요 사립대에 대한 ‘규제 완화’를 언급했습니다.
“등록금 등 재정 운영의 자율성, 정원 및 학사조직 운영의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AI·바이오·반도체·기후·에너지 등 미래 분야는 학문 간 융합이 필수적입니다. 연구중심대학에는 학과 신설·개편과 정원 조정, 융합 교육, 연구조직 운영에 보다 큰 자율성이 필요합니다.”
▷대학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일수록 대학의 역할은 중요해집니다.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대는 중세 유럽에서 법학 연구와 교육의 중심지가 됐고, 19세기 초 설립된 훔볼트대는 교육과 연구를 결합한 근대 연구중심대학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대학은 시대마다 지식을 종합하고 축적해 사회에 전파해왔습니다. AI가 방대한 정보를 쏟아내고 디스토피아에 대한 두려움이 나오는 지금, 새로운 지식을 정리하고 AI를 올바른 방향으로 통제하는 것은 결국 대학의 역할입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