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는 1990년 세계 경제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법안을 제정했다.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모태가 된 석유기금안정법이다. 1969년 북해 유전 개발로 ‘돈벼락’을 맞은 노르웨이는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에 취해 복지 확충에 나섰다가 크로네화 가치와 임금은 급등하면서 석유 외 전통산업은 비틀대는 ‘자원의 저주’에 휘말렸다. 1980년대 말 유가가 3분의 1로 급락하자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노르웨이 빅3 은행이 연쇄 도산 위기에까지 몰렸다.“석유만 믿다가는 나라가 거덜 날 수 있겠다”는 국민적 공포감 속에서 나온 법이다. 석유 세수를 일반 예산과 완전 격리하는 것은 물론 단 한 푼도 국내에 남겨놓지 않고 전액 해외 자산에만 투자하는 것이다. 우파 정권에서 추진했지만 올해 월드컵 노 젓기 응원 때처럼 여야 가릴 것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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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 적립을 시작한 것은 6년이나 지나서다. 그사이에도 북해 석유 세수가 계속 들어왔지만 국가 부채를 갚는 데부터 썼다. 한쪽에서 빚을 지면서 다른 쪽에 돈을 쌓는 것은 국민에 대한 회계 기만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다. 순외채가 제로(0)가 된 뒤 1996년 5월에서야 첫 기금 3억달러가 투입됐다. 이 돈이 지금 2조4000억달러로 불어나면서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세계 증시 시가총액의 1.5%에 달하는 최대 국부펀드로 성장했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규모보다 더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재정준칙이다. 1990년대부터 유가가 다시 오르자 이 돈을 국내로 들여와 복지와 인프라 확충 등에 쓰자는 정치권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좌파가 나섰다. 2001년 사회민주당 정권에서 ‘미래 복지를 위해 지금의 복지를 틀어막는다’는 원칙 아래 펀드 총자산의 4% 내에서만 예산 전입이 가능하도록 자물쇠를 채웠다. 현재는 3%로 더 강화됐다. 이 룰의 예외가 적용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국가적 위기 사태 때다.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해외 자산에만 투자하도록 한 것은 근본적으로 환율 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정치적으로 남용되는 것을 막는 데도 큰 역할을 한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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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내년 예산안에서 가장 큰 특징인 미래대응기금은 노르웨이 국부펀드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호황기 세수를 적립해 미래와 불황기에 대비한다는 취지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저 흉내만 낸 게 아닌가 싶다.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제1원칙은 국가 부채를 다 갚은 뒤부터 기금을 쌓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기조는 부채 상환을 외면하거나, 더 나아가 다른 쓸 데가 많은데 부채부터 갚으면 어리석은 짓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국가 부채가 1500조원을 향해 가고 그중 70% 이상이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적자성 채무인데도 미래대응기금 163조원 중 내년 부채 감소에 쓰이는 돈은 12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채 비중이 각각 120%, 200%를 웃도는 미국과 일본에서 위안을 찾는다면 참 위험한 발상이다. 달러 발권국인 미국, 세계 최고 수준의 채권국이자 국채 대부분을 국내 기관·개인이 가진 일본과 우리는 황새와 뱁새 격이다. 그러면서 고령화 속도와 저출생 정도는 그들을 훨씬 초월한다. 부채 상환과 관련해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면 세계잉여금 처리를 지방교부금 정산, 공적 자금, 국가채무 상환 순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재정법 90조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세대 간 정의’에 입각해 원금은 건드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 정부의 미래대응기금은 현재 또는 가까운 미래에 써버리겠다는 데 방점이 있어 보인다. 지방 국립대 전액 무상 등록금과 이런저런 명목의 청년·아동 예산은 내년부터 집행이고 ‘비상금’ 조의 104조원에 대해서도 대통령령이라는 재량 집행 규모는 30%나 된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연금 역할에 대해 일었던 의혹이 2028년 총선에서 미래대응기금으로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석유라는 ‘횡재’를 절제와 합리적 설계를 통해 거대한 국부로 키운 모범 사례다. 반도체 초과 세수라는 정권의 행운을 국가적 실력과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절제와 합리적 설계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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