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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패권국 될 줄이야"…美·日 뒤늦은 후회 [박신영의 월가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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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패권국 될 줄이야"…美·日 뒤늦은 후회 [박신영의 월가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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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가 아나토미 네 번째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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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메모리 반도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AI 시대를 맞아 가장 주목받는 반도체 가운데 하나가 HBM, 고대역폭메모리입니다. 이제 엔비디아의 AI GPU를 이야기하면서 HBM을 빼놓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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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처음 만든 나라는 미국입니다. 이후 세계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 메모리 산업의 중심에는 한국이 있습니다.


    이번 월가 아나토미에서는 메모리 산업의 패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또 AI 시대를 맞아 메모리 산업의 경쟁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도 짚어보겠습니다.
    1. 원자재 취급받던 메모리
    먼저 반도체를 크게 나눠보겠습니다.

    반도체에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가 있고, 데이터를 계산하고 처리하는 시스템 반도체, 즉 로직 반도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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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 반도체는 생각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CPU와 GPU가 대표적입니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는 CPU나 GPU가 계산할 때 필요한 정보를 보관하고 꺼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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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리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가 있고, 최근 AI 시대의 핵심으로 떠오른 HBM도 결국 D램을 기반으로 만든 메모리입니다.

    과거 월가와 반도체 업계는 이 두 산업을 상당히 다르게 바라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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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PU나 GPU는 새로운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소프트웨어 생태계까지 만들어야 합니다. 인텔이나 엔비디아처럼 특정 기업의 기술력이 제품 자체의 차별화로 이어지는 시장입니다.

    반면 과거 D램은 점차 표준화된 제품으로 발전했습니다.

    일정한 규격만 충족하면 어느 업체의 제품이든 PC나 서버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장에서는 CPU를 기술기업의 차별화된 제품으로 본 반면, D램은 상대적으로 원자재에 가까운 제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2. CPU와 D램의 결정적인 차이

    CPU는 설계 자체가 경쟁력입니다.

    CPU 내부를 어떤 구조로 만들고, 얼마나 빠르게 계산하며, 얼마나 적은 전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생태계입니다.

    아무리 좋은 CPU를 만들어도 그 위에서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인텔이 오랫동안 PC 시장에서 강력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CPU를 잘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x86 아키텍처를 중심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와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연결되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D램은 달랐습니다.

    D램 역시 첨단 기술이 필요한 제품이지만 표준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회사가 만들었느냐보다 정해진 규격을 충족하느냐가 중요해졌습니다.

    결국 경쟁의 중심도 누가 더 독창적으로 설계하느냐보다는 누가 더 싸고,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생산하느냐로 이동했습니다.

    이 차이가 이후 미국과 일본, 한국의 선택을 갈라놓게 됩니다.
    3. CPU가 만든 생태계에 D램 편입
    CPU와 D램의 가장 큰 차이는 컴퓨터에서 누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느냐에 있습니다.

    컴퓨터의 본래 목적은 정보를 저장하는 것보다 계산하고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덧셈과 곱셈 같은 계산부터 정해진 명령을 순서대로 실행하는 일을 담당하는 핵심 장치가 중앙처리장치, 즉 CPU입니다.

    메모리는 CPU가 이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CPU가 계산하려면 어떤 명령을 실행해야 하는지, 계산할 숫자는 무엇인지, 중간 결과는 무엇인지 잠시 보관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CPU가 컴퓨터의 '뇌'라면 D램은 CPU가 당장 필요한 데이터를 올려놓는 '작업용 기억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CPU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계산을 담당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CPU가 바뀌면 그 CPU에 맞춰 컴퓨터 전체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인텔이 새로운 CPU를 개발하면 어떤 명령어를 처리할지, 어떤 메모리를 사용할지 등이 함께 결정됩니다.

    그러면 D램 업체는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규격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D램을 개발하더라도 CPU와 메인보드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실제 PC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4. D램 경쟁력은 결국 ‘생산 역량’

    산업이 발전하면서 CPU와 D램의 경제성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PC 시대에는 인텔의 x86 CPU를 중심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PC 제조업체,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연결되면서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됐습니다.

    반면 D램은 특정 업체의 제품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이유가 크지 않았습니다.

    PC 제조업체 입장에서 삼성전자 D램을 사용할 때마다 컴퓨터를 새로 설계하고, 마이크론 제품으로 바꿀 때 다시 설계해야 한다면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메모리의 크기와 작동 방식, 전압, 속도, 데이터 전달 방식 같은 기본 규격이 표준화됐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제품이 모두 같은 규격을 충족하고 품질도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결국 가격 경쟁력이 중요해집니다.

    여기에 수율도 핵심 경쟁력이 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웨이퍼 한 장에서 한 회사는 정상적인 D램 700개를 생산하고 다른 회사는 900개를 생산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같은 웨이퍼와 비슷한 장비를 사용했다면 900개를 생산하는 회사의 칩 한 개당 원가는 훨씬 낮아집니다.

    수율이 높으면 원가를 낮출 수 있고, 원가가 낮으면 경쟁사보다 가격을 낮추면서도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생산 규모도 중요합니다.

    D램은 PC와 서버, 스마트폰 등에 엄청난 수량이 필요한 제품입니다. 따라서 좋은 제품 몇 개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수백만 개, 수천만 개를 동일한 품질로 대량 생산해야 합니다.

    공장을 크게 짓고 생산량을 늘릴수록 규모의 경제도 발생합니다.

    결국 D램이 표준화되면서 경쟁력의 핵심은 설계의 차별화보다는 수율과 원가, 대량생산 능력으로 이동했습니다.
    5. D램 가격 사이클의 구조
    이런 산업구조에서 메모리 산업의 또 다른 특징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가격 사이클'입니다.

    D램은 수요가 늘었다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제품이 아닙니다.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는 데 막대한 자금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공장이 완성된 뒤에도 장비 설치와 생산라인 안정화, 수율 개선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즉 수요는 빠르게 변하지만 공급은 천천히 움직입니다.

    바로 이 시차가 메모리 가격 사이클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PC 판매가 갑자기 크게 늘어나면 PC 한 대마다 필요한 D램 수요도 증가합니다.

    메모리 업체들은 부족한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합니다.

    하지만 투자를 결정했을 때는 D램이 부족했더라도 1~2년 뒤 새로운 생산능력이 가동될 때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PC 판매 증가세가 둔화되거나 경기침체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투자했던 공장에서는 이제 D램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면 가격이 떨어지고 업체들의 이익도 급격히 줄어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격이 원가 이하까지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업체들은 다시 투자를 줄입니다.

    이후 공급 증가가 둔화되고 수요가 회복되면 다시 공급 부족이 나타나면서 가격이 오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 메모리 사이클입니다.

    여기에 D램 산업은 고정비가 매우 큰 산업입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 공장과 장비를 갖춘 뒤에는 가격이 조금 떨어졌다고 생산을 바로 중단하기 어렵습니다. 공장을 세워놓고 생산하지 않는 것 역시 큰 손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요가 둔화돼도 한동안 생산이 계속되면서 공급과잉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이클이 단순히 기업들이 무모하게 공장을 많이 지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기업은 미래 수요를 예상해 합리적으로 투자하지만 공장을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미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경쟁사가 증설하는 상황에서 혼자 투자를 줄이면 시장점유율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결국 여러 업체가 동시에 투자하고 그 생산능력이 뒤늦게 시장에 들어오면서 공급 부족과 공급과잉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6. 삼성·SK하이닉스, D램 선택과 추격 전략

    그렇다면 후발주자였던 한국은 왜 CPU가 아니라 D램에 먼저 도전했을까요.

    D램이 기술적으로 쉬웠기 때문은 아닙니다. 진입장벽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CPU는 칩 하나를 잘 만든다고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 PC 업체까지 연결된 생태계가 필요했습니다.

    반면 D램은 표준화된 제품이었습니다.

    정해진 규격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높은 수율과 낮은 원가로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후발주자도 기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CPU는 기술뿐 아니라 생태계까지 따라잡아야 했지만 D램은 제조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선두업체를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D램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7. 세계 D램 패권의 이동

    한국이 메모리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D램의 탄생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D램은 미국에서 탄생했습니다.

    이후 컴퓨터 시장이 기업용 대형 컴퓨터를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일본이 세계 D램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당시 대형 컴퓨터 업체들은 높은 신뢰성과 품질, 장기간의 안정적인 공급을 중요하게 봤습니다.

    일본 제조업이 강점을 발휘하기 좋은 시장이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이 세계 D램 시장에서 압도적인 위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사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용 PC 시장이 성장하면서 인텔은 CPU에 집중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이른바 '윈텔' 생태계를 장악했습니다.

    가격 변동성이 크고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한 D램 대신 CPU와 소프트웨어라는 더 높은 부가가치 영역에 집중한 것입니다.

    반대로 일본에는 어려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1980년대 메인프레임 중심 시장에서는 강했지만 1990년대 PC가 대중화되면서 D램은 더욱 표준화됐고 가격 경쟁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일본 업체들이 강점을 보였던 높은 내구성과 품질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PC가 대중화되면서 고객 입장에서는 가격이 훨씬 중요한 요소가 됐습니다.

    여기에 엔화 강세와 한국 업체들의 공격적인 투자까지 겹쳤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생산능력을 빠르게 늘리고 새로운 D램 세대로 공격적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업체들을 추격했습니다.

    결국 세계 D램 산업의 패권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미국은 D램에서 물러나 CPU와 소프트웨어라는 더 높은 부가가치 산업을 장악했고, 일본은 CPU의 세계 표준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D램의 주도권까지 잃게 됐습니다.
    8. AI가 바꿔놓은 메모리 게임의 법칙
    그런데 AI 시대가 되면서 메모리 산업의 경쟁 법칙이 다시 바뀌고 있습니다.

    PC 시대에는 얼마나 저렴한 D램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AI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GPU가 아무리 빠르게 계산할 수 있어도 데이터를 제때 공급받지 못하면 GPU가 기다려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GPU가 엄청나게 빠른 자동차인데 도로가 좁아 차가 막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때문에 메모리의 대역폭, 즉 일정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전달할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AI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CPU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면서 메모리가 데이터를 공급하는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메모리 월'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DDR은 계속 새로운 세대로 발전했고 그래픽 분야에서는 GDDR 같은 고속 메모리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더 넓은 데이터 통로가 필요해지면서 HBM이 등장했습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고 TSV라는 미세한 통로로 연결해 GPU 바로 옆에 배치합니다.

    자동차 속도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로 자체를 몇 차선에서 수십 차선으로 넓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HBM이 처음부터 AI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AMD와 SK하이닉스가 2000년대 말부터 개발을 시작했고 2013년 첫 HBM이 등장했습니다. 2015년에는 AMD의 고성능 그래픽카드에 상용 적용됐습니다.

    당시에는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22년 이후 생성형 AI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수천 개, 수만 개의 GPU가 동시에 연산하는 AI 데이터센터에서는 메모리 대역폭이 전체 시스템 성능을 좌우하게 됐습니다.

    먼저 만들어졌던 HBM의 가치를 AI가 뒤늦게 폭발시킨 것입니다.
    9. AI가 바꿔놓은 메모리 사이클

    AI와 HBM의 등장으로 메모리 산업에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는 HBM이 범용 D램 생산능력을 상당 부분 가져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HBM도 기본적으로 D램입니다.

    따라서 HBM 생산을 늘릴수록 메모리 업체의 생산능력이 HBM 쪽으로 배분됩니다.

    게다가 HBM은 일반 D램보다 제조 과정이 훨씬 복잡합니다.

    여러 개의 D램 다이를 쌓아야 하고 TSV와 본딩, 첨단 패키징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양의 웨이퍼를 투입하더라도 일반 D램보다 생산 효율에 부담이 큽니다.

    결국 HBM 수요가 증가하면 D램 생산능력이 HBM으로 이동하고, 범용 D램에 투입할 생산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과거에는 PC나 스마트폰 수요가 늘어나면서 D램 가격이 상승하는 구조가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AI가 HBM 수요를 끌어올리면서 일반 D램 공급까지 제약하는 새로운 구조가 추가된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는 HBM이 범용 D램보다 고객 주문에 맞춰 생산하는 성격이 훨씬 강하다는 점입니다.

    과거 범용 D램은 표준화된 제품이기 때문에 생산량을 먼저 늘린 뒤 여러 고객에게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황기에 업체들이 동시에 생산을 늘리면 이후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HBM은 다릅니다.

    엔비디아나 AMD가 차세대 GPU를 개발하면 메모리 업체가 상당히 이른 단계부터 필요한 용량과 속도, 전력소비, 발열, 패키징 조건을 맞춰야 합니다.

    실제 공급까지 이어지려면 고객사의 까다로운 검증과 인증도 통과해야 합니다.

    따라서 범용 D램보다 고객과 사전에 사양과 물량을 조율하는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도 단순히 가격이 좋다고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 어렵습니다.

    누가 얼마나 구매할 것인지, 어떤 GPU에 들어갈 것인지, 어느 세대 HBM이 필요한지를 고객과 조율하면서 생산능력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기 공급계약과 사전 물량 협의가 확대되면 과거 범용 D램 시장에서 반복됐던 대규모 재고 위험도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10. 뒤늦게 메모리를 쫓아오는 미국

    이런 변화 속에서 미국이 다시 메모리 산업에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기업이 마이크론입니다.

    마이크론은 미국 업체들이 D램 산업에서 대부분 철수한 이후에도 남아 있던 사실상 유일한 미국 대형 메모리 업체입니다.

    AI 시대가 되면서 마이크론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마이크론은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동시에 미국 내 생산능력도 크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2035년까지 미국에 25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할 계획입니다.

    아이다호와 뉴욕에 첨단 D램 공장을 건설하고 버지니아 생산시설을 확대하는 한편, HBM 관련 첨단 패키징 기반도 미국에 구축하려 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자사 D램 생산량의 약 40%를 미국에서 생산한다는 목표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마이크론 한 기업의 투자만이 아닙니다.

    AI 시대에는 메모리가 경제안보와 직접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AI용 GPU가 있더라도 HBM을 공급받지 못하면 AI 서버를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메모리를 해외 생산에만 의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움직임은 인텔입니다.

    인텔은 소프트뱅크 계열 사이메모리(SAIMEMORY)와 함께 ZAM, 즉 Z-Angle Memory라는 차세대 적층 D램 기술 개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목표는 HBM 이후를 겨냥해 더 높은 용량과 대역폭을 제공하면서 전력소비를 낮춘 차세대 메모리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시제품 목표는 2027년, 상용화 목표는 2030년 전후입니다.

    과거 D램 산업에서 상당 부분 물러났던 미국이 AI 시대가 되면서 메모리를 다시 전략기술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11. 일본도 다시 생산·기술 기반 강화

    일본 역시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의 전략은 일본 기업이 다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처럼 세계 D램 시장 1위에 올라서겠다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은 일본 안에 첨단 메모리 생산기반과 관련 기술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론의 히로시마 공장입니다.

    마이크론은 히로시마에서 첨단 D램과 HBM 생산 기반을 확대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도 최대 5360억엔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첨단 D램 생산시설이 일본에 남게 됩니다.

    공급망 충격이나 지정학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본 안에서 첨단 메모리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제안보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기술과 인력도 함께 남습니다.

    마이크론은 히로시마에서 생산뿐 아니라 첨단 메모리 연구개발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공장이 들어서면 소재와 장비, 부품업체, 대학, 엔지니어까지 함께 움직이면서 반도체 생태계를 유지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본 소프트뱅크 계열 사이메모리는 인텔과 ZAM을 공동 개발하고 있습니다.

    ZAM은 현재 HBM처럼 D램을 단순히 위로 쌓는 방식과 달리 D램을 세워 옆으로 배열하는 새로운 적층 구조입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더 큰 용량과 높은 대역폭을 확보하면서 전력소비까지 낮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쉽게 말해 HBM 이후를 겨냥한 차세대 메모리 후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12. 메모리 공급난 언제까지

    그렇다면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메모리 공급 부족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현재 공급난의 출발점에는 AI가 있습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면서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문제는 HBM을 생산하기 위해 일반 D램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생산능력까지 투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HBM에 더 많은 생산능력을 배정하게 되고, 그만큼 일반 서버용 D램과 DDR 공급은 상대적으로 줄어듭니다.

    반면 새로운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늘리기는 어렵습니다.

    새로운 D램 공장을 계획하고 장비를 들여와 실제 양산에 들어가기까지 수년이 걸립니다.

    기존 공장에서도 장비와 공정을 전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재 업계 전망을 종합하면 2027년까지는 공급 부족이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트렌드포스는 2027년까지 공급 부족이 지속되고 신규 생산능력이 의미 있게 기여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2028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역시 2027년 공급 부족이 이어지고 2028년부터 일부 완화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공급 상황을 더욱 타이트하게 보고 있습니다.

    2027년이 오히려 공급 측면에서 가장 어려운 해가 될 가능성이 있고, AI 수요가 예상보다 강하다면 2030년을 넘어서도 수요가 생산능력을 웃돌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13. 현재 가격 추이는?

    실제 공급 부족은 가격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그래프는 DDR5 16Gb 제품의 현물가격과 계약가격을 비교한 것입니다.

    현물가격은 시장에서 당장 제품을 구매할 때 형성되는 가격이고, 계약가격은 메모리 업체와 대형 고객이 일정 기간 공급계약을 맺으면서 정하는 가격입니다.

    2025년 하반기부터 현물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DDR5 16Gb 현물가격이 약 54달러, 계약가격은 약 46달러 수준입니다.

    현물가격이 계약가격보다 약 16% 높은 프리미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물가격은 공급 부족이 발생하면 계약가격보다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제품이 필요한 업체들이 더 높은 가격을 지급하고서라도 물량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가격 흐름은 단순히 메모리 가격이 올랐다는 것뿐 아니라 시장에서 당장 확보할 수 있는 물량 자체가 빠듯하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물가격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이후 계약가격에도 추가적인 상승 압력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14. 중국의 부상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기업은 CXMT, 창신메모리입니다.

    과거 중국 메모리 업체들은 첨단 D램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과 상당한 기술 격차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이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CXMT는 이미 세계 4위 D램 업체로 성장했고 생산능력도 빠르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D램에서도 LPDDR6 양산에 나서면서 중국 스마트폰 업체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HBM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HBM은 사실상 기술 개발 단계에 머물렀습니다.

    2023년 전후에는 기술 개발과 샘플 테스트 수준이었다면 2024~2025년에는 파일럿 라인을 구축하고 고객에게 샘플을 제공하는 단계로 넘어왔습니다.

    2026년에는 첨단 HBM을 소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물론 중국이 현재 SK하이닉스처럼 HBM4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HBM을 만들지 못하는 단계에서 실제 생산 경험을 쌓는 단계로 넘어왔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CXMT는 2027년 12단 적층 HBM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 메모리 산업을 볼 때는 현재 시장점유율뿐 아니라 기술 격차가 얼마나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5. 중국의 점유율 확대

    시장점유율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D램과 낸드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존재감이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D램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친 한국 업체들의 점유율이 여전히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CXMT가 빠르게 점유율을 늘리면서 중국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낸드 시장에서도 YMTC를 중심으로 중국 업체들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반면 HBM은 상황이 다릅니다.

    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합친 한국 업체들이 여전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마이크론이 뒤를 쫓고 있습니다.

    중국은 아직 의미 있는 글로벌 HBM 시장점유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메모리 산업의 현재 위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범용 메모리에서는 이미 시장점유율 경쟁이 시작됐지만 최고급 HBM에서는 아직 기술 추격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16. 중국, 얼마나 위협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은 범용 DDR D램 분야에서는 상당한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범용 D램은 PC와 서버 등에 널리 사용되는 표준화된 일반 D램을 말합니다.

    CXMT가 이미 세계 4위 업체로 성장했고 대규모 증설까지 진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범용 D램은 가격 경쟁이 매우 중요한 시장입니다.

    중국 업체들이 정부 지원과 대규모 생산능력을 앞세워 가격을 낮추기 시작한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도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LPDDR, 즉 모바일 메모리에서도 위협이 커지고 있습니다.

    CXMT가 LPDDR6까지 생산하면서 중국 스마트폰 업체에 공급하기 시작하면 거대한 중국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생산 경험과 수율을 빠르게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HBM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초기 HBM 제품에서는 중국이 이미 소규모 생산 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에 위협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신 HBM3E와 HBM4에서는 아직 한국 업체들의 우위가 큽니다.

    특히 대량 양산 수율과 TSV, 본딩, 첨단 패키징 기술에서 격차가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장벽이 고객 인증입니다.

    HBM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고 바로 판매할 수 있는 반도체가 아닙니다.

    엔비디아나 AMD 같은 고객사의 GPU와 함께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야 합니다.

    따라서 현재 중국의 위협을 단순히 높다거나 낮다고 평가하기보다는 '범용 D램에서는 이미 경쟁자, 최신 HBM에서는 아직 추격자'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17. 중국이 HBM 경쟁력을 가지려면?

    그렇다면 중국이 HBM에서도 선두업체를 따라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D램 자체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HBM도 기본적으로 D램이지만 일반 D램 여러 개를 단순히 쌓아놓은 제품은 아닙니다.

    얇게 만든 여러 개의 D램 다이를 수직으로 쌓고 TSV라는 미세한 통로로 연결한 뒤 GPU와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해야 합니다.

    D램 공정과 적층, 본딩, 패키징 기술이 모두 뒷받침돼야 합니다.

    두 번째는 수율입니다.

    일반 D램은 개별 칩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됩니다.

    하지만 HBM은 여러 개의 다이를 쌓아 하나의 제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개별 다이의 품질이 좋아도 적층이나 접합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최종 수율이 크게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연구실에서 HBM 샘플을 만드는 것과 수십만 개를 동일한 품질로 양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첨단 패키징입니다.

    HBM은 GPU 바로 옆에 배치돼야 하기 때문에 GPU와 HBM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필요합니다.

    TSMC의 CoWoS가 대표적입니다.

    결국 메모리 회사 혼자 기술력을 확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파운드리와 패키징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는 고객과의 공동개발입니다.

    이것이 HBM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 D램은 표준 제품을 만들어 여러 고객에게 판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HBM은 엔비디아나 AMD의 차세대 GPU가 요구하는 속도와 전력, 발열, 용량에 맞춰 제품을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GPU가 개발되는 단계부터 메모리 업체가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은 이미 주요 고객들과 이런 관계를 오랫동안 구축해왔습니다.

    마지막은 세대교체 속도입니다.

    HBM3에서 HBM3E, HBM4, HBM4E로 제품 세대가 매우 빠르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후발주자가 선두업체가 현재 생산하는 제품만 따라가서는 격차를 좁히기 어렵습니다.

    선두업체보다 더 빠르게 기술을 개선해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이 HBM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서 곧바로 한국 업체들과 같은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개발 성공과 대량 양산, 그리고 실제 고객 매출은 각각 다른 단계입니다.
    18. HBM의 역설적 구조

    마지막으로 HBM 시장의 독특한 구조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HBM은 HBM3에서 HBM3E, 다시 HBM4와 HBM4E로 제품 세대가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제품 세대가 빠르게 교체될수록 메모리 업체의 위험은 커집니다.

    HBM은 일반 D램보다 훨씬 비싼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특정 세대 제품을 생산했는데 고객사가 빠르게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기존 제품의 재고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질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이 위험을 줄이기 위해 고객과 미리 사양과 물량을 조율합니다.

    예를 들어 엔비디아가 차세대 GPU를 개발할 때 필요한 HBM의 성능과 용량을 사전에 협의하고 테스트와 인증을 진행합니다.

    어느 정도의 물량을 공급할지도 미리 논의합니다.

    이 때문에 HBM은 범용 D램보다 주문형 제품의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선두업체의 강점이 나타납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은 엔비디아와 AMD, 주요 클라우드 업체들과 오랜 기간 관계를 구축해왔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신규 업체의 HBM을 핵심 GPU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후발주자인 CXMT에는 이것이 또 하나의 진입장벽이 됩니다.

    CXMT가 HBM3E 수준의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시장이 HBM4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술적으로 HBM3E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해당 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할 고객을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결국 HBM 시장에서는 단순히 현재 기술을 따라잡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객이 다음에 필요로 하는 제품을 미리 개발하고, 대량 양산할 수 있는 수율을 확보하고, 고객 인증을 통과해 실제 매출로 연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국이 범용 D램에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HBM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선두업체를 단기간에 따라잡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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