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6,909.91

  • 124.01
  • 1.76%
코스닥

820.64

  • 16.28
  • 1.95%
1/4

구청장들이 재건축에 목매는 진짜 이유[안재광의 천만의 동네]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뉴스 듣기-

지금 보시는 뉴스를 읽어드립니다.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구청장들이 재건축에 목매는 진짜 이유[안재광의 천만의 동네]

주요 기사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ADVERTISEMENT


    지난 8월 한성숙 국무총리가 서울 자치구 구청장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25명 중 21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선 500세대 미만 재개발·재건축의 인허가 권한을 자치구로 넘기는 방안이 논의됐습니다. 서울시 심의를 거치느라 몇 달, 몇 년씩 걸리는 절차를 걷어내 주택 공급에 속도를 붙이자는 취지였습니다. 권한을 구청장에게 더 주겠다는 자리인데 분위기가 마냥 좋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회의에서 마이크를 잡은 한 구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속성만 중시하는 것이지 도시 전체의 정합성 측면에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서울시와 충분히 협의해 점진적으로 가야 한다.” 사실상 반대 의견이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구청장은 권한 이양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구청장들이 회의적인 의견을 보인 겁니다. 또 다른 구청장은 “서울시 부시장이 함께 배석했으면 좋았겠다”며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권한 더 준다는데 왜 고사하나
    이상한 일입니다. 6·3 지방선거가 끝난 뒤 자치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재개발·재건축에 매달렸습니다.

    ADVERTISEMENT


    김현기 강남구청장은 취임 후 첫 결재로 은마아파트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처리했습니다. 김 구청장이 직접 단지를 찾아 인가서를 전달했습니다. 최단 처리 기록을 세웠다고 강남구청은 홍보했습니다. 다른 구청들도 대동소이했습니다. 노원구는 서울시 최초로 현장형 신속통합기획 자문회의를 열었습니다. 도봉구는 창동주공18단지 추진위 승인을 ‘창동·상계지구 1호’로 홍보했습니다. 구로구는 전문가 18명으로 자문단을 꾸렸고 영등포구는 재개발 상담 5690건을 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속도를 내왔던 자치구들인데 정작 권한을 준다니 머뭇거립니다. 왜일까요. 첫째는 이게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권한 이양에 소극적인 곳은 대체로 국민의힘 구청장들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구청장들은 거의 모두 찬성했습니다. 현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용산공원 주택 공급과 부동산 세제를 두고 연일 부딪히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서울시를 건너뛰고 구청장들과 직접 손을 잡겠다는 것이니 국민의힘 소속 구청장들로선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겁니다.


    둘째가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서울시가 그동안 ‘방패막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재건축·재개발과 관련해 무리한 요구를 들고 올 때가 많습니다. 용적률을 올려달라, 도로를 더 놓아달라, 지하철을 연결해달라 등. 그럼 구청장들의 답변은 비슷했습니다. 나도 여러분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권한은 서울시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라. 실제로 한 구청장은 이렇게 말해왔다고 털어놨습니다. 임대아파트 세입자들의 이주비 요구 같은 민원이 오면 서울시로 보냈다고요. 그런데 권한이 내려오면 ‘서울시 핑계’를 대기 어렵습니다. 구청장이 원망 받는 사람이 됩니다. 재건축은 자기 재산이 걸린 문제라 주민들이 극도로 예민합니다. 또 다른 구청장은 다른 걱정을 보탰습니다. “인허가권에는 큰 이권이 걸려 있는데 구청 공무원이 주민을 자주 만나다 보면 약해진다”는 겁니다. 만나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도와주게 되니 사심이 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구청장들의 진짜 속내

    ADVERTISEMENT


    보다 근본적으로, 그럼 자치구들은 왜 재개발·재건축에 매달릴까요. 낡은 동네가 마천루로 바뀌고 집값이 오르니 주민들이 좋아합니다. 이게 또 표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다들 아는 이야기입니다.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공공기여입니다.

    정비사업에서 용적률을 올려주면 조합은 그만큼 이득을 얻습니다. 대신 늘어난 이익의 일부를 도로나 공원, 공공시설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이 몫을 자치구가 받습니다. 강북의 한 구청장의 설명이 구체적입니다. “원래 18층, 20층이던 것을 30층, 40층까지 올려주면 개발이익이 생기니 그 대가로 종합복지타운을 지어 기부채납하라고 요구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미디어센터를 지어라, 공원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어라, 문화예술 창작센터를 지어라. 이런 식으로 협상이 이뤄집니다.

    ADVERTISEMENT


    서울 시내 한 뉴타운 이야깁니다. 단지 한가운데 대규모 종합복지타운이 들어섭니다.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복지관, 아이 돌봄센터가 예정됐습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쓰는 시설이라 누구도 반대하기 어렵습니다. 그 옆에는 예술학교와 연계한 문화예술 창작센터와 대규모 공연장, 미술 전시관 등이 자리 잡습니다. 여기에 공공도서관, 미디어센터까지 더해집니다. 이 뉴타운이 완성되면 집에서 5분 안에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는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낸 시설의 가치, 1조원 이상으로 추산합니다.

    특히 재정자립도가 낮은 자치구는 이런 공공기여가 ‘꿀단지’입니다. 구 예산으로 수백억원짜리 공공시설을 짓기도 쉽지 않습니다. 주민센터 하나 새로 지으려 해도 100억원이 넘습니다. 구청 입장에선 엄두도 못 낼 시설을 민간 자본으로 짓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 바로 정비사업입니다. 복지관과 도서관, 체육관, 공연장이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구청장에게 재건축은 주택 공급 사업인 동시에 재정 사업입니다. 아무도 이걸 전면에 내세우진 않지만 이 계산을 빼고 구청장들의 재건축에 대한 열의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서울시와의 마찰도 종종 생깁니다. 서울시가 약속했던 공공기여 시설을 막판에 구 재원으로 하라고 뒤집은 일도 종종 있습니다. 자치구 입장에선 서울시가 이익을 다 가져간다는 불만이 쌓입니다. 건폐율, 용적률의 경미한 변경 권한은 구청에 달라는 요구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ADVERTISEMENT



    ◆집만 지어서 되는 도시인가

    재건축·재개발이 주민들의 열망이든 구청장의 욕심이든 다 좋습니다. 결국 서울이 사람들에게 좋은 도시가 된다면요. 하지만 진짜 그런가요.

    한 서울 시내 자치구 얘깁니다. 주택에서 아파트 비율이 60%에 육박하고 정비사업 구역만 100곳이 훌쩍 넘습니다. 대학도 있고 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구청장의 말이 씁쓸합니다. 창업까지는 하는데 정작 조금 커버리면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사만이라도 남겨달라고 부탁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자치구가 즐비합니다. 중랑구는 1963년 경기도 양주에서 편입된 뒤 줄곧 집만 지어온 동네입니다. 구청은 차량기지를 외곽으로 옮겨 그 자리에 산업시설을 넣겠다는 구상을 밝혔습니다. 은평구도 다르지 않습니다. 서울시 소유 부지를 두고 서울시는 아파트를 지으려 하지만 구청은 기업과 컨벤션이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호텔 하나 없고 광장 하나 없는 동네라는 겁니다.

    이들 구청장의 말은 비슷합니다. 집은 충분히 지었다, 이제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기업 유치는 지난한 일입니다. 스타트업을 아무리 키워도 매출과 고용 규모가 작습니다. 대학이 몰린 관악·성북·서대문 등 모두 사정이 비슷합니다. 기업 본사는 여전히 강남·종로·중구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치구들은 문화나 복지에서 활로를 찾습니다. 은평구는 자연환경과 문화시설을 내세워 미래 먹거리를 문화에서 찾겠다고 합니다. 강남이 회색 도시라면 은평은 물과 자연이 있는 도시라는 겁니다. 나쁘지 않은 전략입니다. 다만 문화도 복지도 결국 주민이 벌어들일 소득이 있어야 굴러갑니다. 아침마다 다른 구로 출근했다 밤늦게 돌아오는 도시에서 지역경제가 살아나기는 어렵습니다. 강남권의 한 구청장은 총리 앞에서 “제발 집만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20세기에는 집만 지었지만 21세기 도시는 주거와 업무, 문화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서울시가 내건 목표는 ‘글로벌 톱3 도시’입니다. 런던, 뉴욕, 파리와 겨루겠다는 것입니다. 그 도시들의 경쟁력이 아파트 물량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 일자리가 있고, 이동이 자유롭고, 사는 곳 가까이에서 일하고 즐길 수 있어야 좋은 도시입니다. 서울에 아파트만 즐비하다면, 그리고 계속 집만 짓겠다고 나선다면 재건축·재개발의 권한을 누가 쥐든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안재광 한국경제신문 기자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