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빈 워시 Fed(미국 중앙은행) 의장의 잭슨홀 연설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8일(미국 동부시간) 워시는 첫 잭슨홀 연설에서 "현재 최우선 관심은 물가여야 한다" "인플레이션의 기저 추세가 의미 있게 개선됐다고 볼 수 없다"며 매파(물가 안정을 위해 긴축을 우선하는 기조)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쏟아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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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워시가 매파 본색을 드러냈다"며 또 한 번 긴축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9월 금리 인상 확률이 치솟으며 28일 단기금리가 급등했고 증시, 금, 비트코인은 일제히 급락했습니다. 그나마 덜 오르는 듯했던 장기금리는 31일 크게 뛰었습니다. 미국채 10년물 금리는 4.76%를 넘어 2025년 1월 이후 최고치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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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9월 금리 인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워시의 발언을 믿지 않는 기색입니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는 조만간 발표될 미국의 8월 고용·물가 지표가 시장 예상대로 나온다면 Fed가 9월에도 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봤습니다. 워시의 말보다는 실제 지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씨티는 더 나아가 8월 미국 실업률이 4.2%로 상승할 것이라며 '9월 동결, 10월 금리 인하'도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런 분석은 취사선택의 영역입니다. 시장 참여자들의 금리 베팅도 이벤트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뀝니다. 단기 변동성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시장의 큰 물줄기를 만드는 시대적 변수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워시의 연설도 그렇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원론적인 말보다, AI가 경제의 공급 능력을 바꾸는 시대에 통화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그의 인식입니다.
연설 전체를 따라가보면 워시를 전통적인 매파로 단정짓기 어렵습니다. 이날 장기금리가 다시 오르는 데에는 월가가 워시의 이런 전략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워시가 AI에 대해 남긴 말을 곱씹어 보면 매파라는 해석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도 가능합니다. 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성 혁명,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억제했던 '그린스펀 전략'의 재현입니다.
"한 번만 더 기다려보자"
앨런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통화정책을 이끌며 1990년대 미국의 고성장·저물가·저실업 호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지금의 AI 투자 붐을 이야기할 때 늘 거론되는 닷컴 버블이 생기고 터진 것도 그린스펀 재임기입니다. 그린스펀은 1996년 IT 붐으로 주식시장이 달아오르자 그 유명한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란 말로 버블의 위험을 경고한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이 생산성 혁명을 주도하고 있다는 가설을 통화정책에 가장 과감하게 반영한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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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경제 상황은 지금과 닮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1996년 중반 실업률은 자연실업률보다 낮았고 성장률은 잠재성장률을 넘어설 전망이었습니다. 과거 공식대로라면 곧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니 선제적으로 금리를 인상해야 했습니다. 실제 FOMC 내부에서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린스펀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그는 1996년 9월 FOMC에서 성장은 강한데 물가는 안정적인 현상이 기존 통계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생산성 향상의 결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성장·저실업을 과열의 증거로만 보는 대신, 컴퓨터와 닷컴 혁명으로 미국 경제의 생산 능력이 높아졌을 가능성을 제시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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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은 이 덕분에 인플레이션 없이도 더 빠른 성장과 더 낮은 실업률이 가능하다고 FOMC 위원들을 설득해 금리 인상을 미루자고 주장했습니다. “Fed의 목표는 경제와 금융 환경을 개선해 구조적인 생산성 향상을 촉진할 기술적인 혁신과 투자를 장려하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습습니다. 그린스펀의 ‘버티기’ 전략에 결과적으로 Fed는 1996년 중반부터 1998년 후반까지 금리를 단 한 차례만 올렸습니다. 이 기간 경제성장률은 더 높아졌고 실업률은 하락했지만 근원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후일 파월 전 Fed 의장은 2018년 잭슨홀 연설에서 이를 "한 번만 더, 다음 회의까지만 기다려보자. 인플레이션이 오른다는 더 분명한 신호가 나타나면 그때 긴축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전략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파월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장기 기대 인플레이션이 안정돼 있었기 때문에 Fed가 실제 인플레이션이 올라오는지 여부를 기다릴 여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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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그린스펀의 직감은 맞았습니다. 1996년 3분기 미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0.4%에 그쳤지만, 이후 개정된 통계에서는 2.5%로 대폭 상향 조정됐습니다. 1999년 그린스펀은 생산성 증가율이 약 3%까지 상승한 것을 확인하고 "생산성 향상이 인플레이션 둔화의 핵심 요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바뀐 산업을 제대로 반영 못한 낡은 통계, 경제 성장 뒤엔 반드시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란 고정관념에 따라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렸다면 뒤늦게 확인된 생산성 혁신을 Fed가 꺾을 수도 있었던 셈입니다.
"AI는 미래 경제성장의 씨앗"
미국 세인트루이스연은 연구진은 지난 7월 <생산성 호황기 통화정책방향 설정> 논문에서 "기술 발전과 생산성 증가, 그것이 통화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린스펀이 보인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수 있다"며 "AI는 이와 유사한 혁신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신기술"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케빈 워시의 생각도 같아 보입니다. 그린스펀이 겪은 닷컴 혁명으로부터 30년이 지나, 워시는 자신의 첫 잭슨홀 연설에 <우리의 시대(In Our Time)>라는 제목을 붙이고 "우리는 역사의 전환점에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워시의 이번 연설은 역대 잭슨홀 연설 중 두 번째로 길었는데, (※참고로 가장 길었던 연설은 앞에서 언급한 파월 전 의장의 2018년 연설 <변화하는 경제에서의 통화정책>이었습니다.) 워시는 그 연설의 첫머리 4분의 1을 AI에 할애했습니다.
워시는 지난 20여년 구조적 장기침체와 저성장, 저축 과잉에 빠져 있던 세계 경제가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견인차는 물론 AI입니다. 그는 AI가 "새로운 변수이자 새로운 생산요소"이며, AI 인프라 투자가 "미래 경제성장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불과 몇 년 전 가장 낙관적인 사람들의 예상보다도 AI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훨씬 높은 성장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통화정책 운용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AI의 도입이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릴 것인지, 그렇다면 그 시점은 언제인지 검토하겠다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1996년 그린스펀의 통찰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입니다.
워시는 변혁기 통화정책 운용의 어려움도 그린스펀과 비슷하게 설명했습니다. "낡거나 부정확한 통계를 근거로 미래를 향한 정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30년의 시차에도 두 연설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AI 같은 새로운 범용기술이 생산성과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다면, 과거의 공식만 믿고 선제적으로 금리를 올리는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워시가 'AI 시대 그린스펀'을 벤치마킹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의 취임 이전부터 알려져 있습니다. 워시의 멘토이자 월가의 전설적 투자자인 스탠리 드러켄밀러는 워시의 Fed 의장 지명 이후 인터뷰에서 "(워시가 그린스펀의 통화정책 접근법에 대해) 매우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며 워시가 "영원한 매파(permanent hawk)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워시는 연설 말미 "(건전한 통화정책이) 세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은 우리(Fed)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현명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Fed가 금리를 올리면 미국 AI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에서도 불리해진다는 지적이 최근 꾸준히 제기되어온 점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말로만 매파' 전략의 양날
물론 1996년과 지금의 물가 상황은 다릅니다. 워시가 기저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내려오지 않으면 금리 인상을 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나, 인플레이션 지표를 임의로 바꾸는 '꼼수'를 쓰거나 단기금리 외에 대차대조표를 정책 수단으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매파적 발언을 쏟아낸 것도 그래서입니다. 말로라도 기대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야누스헨더슨의 대니얼 실룩 글로벌 단기채권 총괄은 이번 잭슨홀 연설을 두고 "Fed 정책의 명료성과 신뢰를 회복하려는 연설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그린스펀의 버티기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장기 기대 인플레이션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덕분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그때와 달리 인플레이션이 이미 목표보다 높습니다. 여기서 기대 심리까지 흔들리면 Fed는 진짜로 금리를 올리는 것 외에 수단이 없습니다. 워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결국 워시는 "인플레이션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매파적 메시지를 강화함으로써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꺾고자 합니다. 그렇게 금리 인상 없이 시간을 버는 동안 AI가 더 빠르게 발전해 생산성을 더 끌어올리고 인플레이션을 둔화시킨다면, 그야말로 Fed와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금리 조정 없이 말로 시장의 기대를 조절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ABN암로은행의 크리스토프 부셰 CIO는 "9월에도 인플레이션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워시가 금리 인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Fed의 신뢰성에 대한 우려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Fed가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것이란 믿음이 흔들리면서 기대 인플레이션과 장기금리가 다시 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시장은 워시의 발언이나 시장의 변덕스러운 금리 인상 베팅보단 실제 인플레이션이 둔화되는지, 기대 인플레이션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AI의 생산성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지 더 주의깊게 지켜볼 것입니다. 첫 관문은 오는 9월 4일, 11일 발표될 미국 8월 고용보고서와 CPI입니다. 나틱시스의 크리스토퍼 호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워시는 매파적 메시지를 주긴 했지만,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해선 역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았다"며 "결국 고용과 물가 지표가 약세를 보인다면 금리를 동결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