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을 다루지만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것. 배우의 숨소리와 조명, 음향의 파동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무대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 쉬게 만드는 것. 김희경 영상디자이너(36)가 정의하는 ‘좋은 무대 영상’의 본질이다. 그는 3차원(3D) 공간 기술을 활용한 ‘무대 사전 시각화’ 작업에 주목했고,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뒤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왔다. 그 결실이 바로 브로드웨이를 뒤흔든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3D 미디어 아트의 정수를 선보이며, 미국 공연계의 러브콜을 받는 창작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그가 이번엔 땅 밑 가장 깊은 바닥, 신화 속 저승으로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다음달 3일 개막하는 국립극단의 신작 연극 ‘역행기’를 통해서다. 연극 무대란 새로운 도전을 앞둔 그를 최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음악에 맞춰 영상이 매끄럽게 흘러가야 하는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텍스트 이면에 깔린 감정과 배우의 숨결에 맞춰 영상의 빛도 함께 숨을 쉬어야 한다. 김 디자이너는 “뮤지컬이 정교한 시곗바늘처럼 미디어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준다면, 연극은 배우의 몸짓과 대사의 결에 따라 라이브 감각이 더욱 극대화된다”며 “특히 이번 작품은 텍스트의 힘이 단단해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온도를 영상의 색감과 빛으로 번역해 내는 작업이 참 매력적이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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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기’는 인류 최초의 문자로 기록된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 여신의 ‘명계 하강’ 서사와 한국 현대사를 견뎌낸 여성 3대의 수난사를 엮어낸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이다. 200분간 펼쳐지는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무대는 한 층, 또 한 층 끝없이 지하로 떨어진다. 물리적으로 극장 바닥을 뚫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 박동우 무대디자이너와 신재훈 연출이 3t에 달하는 거대한 상부 구조물을 천장으로 끌어올리며 ‘추락의 착시’를 만들어내는 동안, 김 디자이너는 그 공간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 작품에서 영상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에게 먼저 서늘하게 말을 건네는 ‘실존하는 장소’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이번 작업에서 가장 파격적인 시도는 영상을 쏘는 방향이다. 벽면이나 바닥에 쏘던 기존 틀을 깨고 무대 천장을 향해 빛을 쏘아 올려 한정된 공간의 깊이감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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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행기’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작품 속 주인공들은 수평적 이동이 아니라 하강을 겪는다. 2막 첫 장면, 인안나의 “없네, 있어 봤자 살아갈 이유가 없네”라는 자조적인 대사처럼 이야기는 절망의 최저점에서 시작한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주머니’, 산업화 시절의 구조적 불평등을 견딘 ‘에레시’, 분업화 시스템 속 진열품 같았던 ‘핑크’ 그리고 기후 위기와 과도한 경쟁에 치인 현대인까지. 여성 3대와 비인간 존재들이 겪어낸 고통이 지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얽힌다.
하지만 김 디자이너는 이 ‘추락’이 결코 끝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극 중에 ‘키갈, 와줘’라는 대사가 나와요. 처음에는 아래로 끌어내리는 호출처럼 들렸는데, 읽을수록 자신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요청처럼 느껴졌습니다. 바닥까지 떨어져 비로소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한 인안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그 바닥은 나락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야 할 통로가 됩니다. 공간을 역행하고 시공간을 되돌려 다시 지상으로 올려 보내는 회귀의 동력이 바로 거기서 터져 나오죠.”
국립극단의 ‘역행기’는 9월 3일부터 13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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