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찾은 중국 랴오닝성 다롄국제회의센터. 다롄항 동부 둥강상무구에 옅은 해무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부터 회의장 주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약·폭발물 탐지견을 이끌고 다니는 보안 요원들이 건물 안팎을 쉴 새 없이 순찰했고, 곳곳에서는 폭발물 등 위험물 여부를 확인하는 보안 인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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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검문 인력이 배치된 가운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1개 회원경제 대표단을 태운 차량이 잇따라 통제선을 통과했다.
회의장 입구에는 '함께 번영하는 아시아·태평양 공동체 구축'이라는 올해 APEC 주제가 내걸려 있었지만 오는 11월 선전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통상·기술·공급망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각 회원경제들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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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한 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은 이날 현장에서 기자를 만나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며 "원래 11월로 갈수록 긴장감이 높아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경주 APEC에서 주요 의제였던 인공지능(AI)이 올해 선전 APEC에서도 핵심적으로 다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지난해 APEC 의장국이었던 만큼 이날 현장에선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매체들이 한국 측 대표단에 집중적으로 질의하면서 주목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다롄 뒤덮은 미·중 공급망 전쟁
이날 개막한 APEC 제3차 고위관리회의(SOM3) 본회의는 11월 18~19일 선전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로 가는 핵심 실무 관문이다. 지난 17일부터 이날까지 다롄에선 약 130개 회의와 행사가 열렸다.21개 회원경제와 APEC 사무국 관계자 등 2300여명이 참석했다. 올해 중국에서 열린 APEC 고위관리회의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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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현장에선 천쉬 2026년 APEC 고위관리회의장이 의제 채택을 요청하며 올 하반기 장관회의와 정상회의의 성과를 만들기 위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마자오쉬 중국 외교부 상무 부부장은 개방·혁신·협력이라는 올해 APEC 정상회의의 세 가지 우선순위를 재차 확인했다. 무역과 연결성, 혁신, 발전을 축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자는 주문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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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의에선 디지털 무역과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서비스 규제, AI, 식량안보, 통관 현대화, 재난 대응, 공급망 회복력 등의 의제가 테이블에 올랐다. 하나같이 향후 각국 기업의 비용과 시장 접근, 기술 경쟁력을 좌우할 사안이다.
회의장 안에서 각 회원경제 대표들이 공동 문구를 조율했고, 복도와 별도 회의실에선 양자 접촉과 실무 협의가 이어졌다. 이번 회의가 3개월 뒤 선전에서 펼쳐질 통상 외교전의 예고편으로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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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APEC 정상회의 개최국인 중국은 개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1월 APEC 정상회의는 중국에 남 다른 의미가 있다. 2001년 상하이, 2014년 베이징에 이은 세 번째 개최이면서 동시에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이 제기된 지 20년 만이기도 하다.

또 중국의 제 15차 5개년 계획(2026~2030) 원년이 겹치는 해다. 중국 정부가 올해 300여개 크고 작은 APEC 행사를 광저우·상하이·청두·다롄·선전으로 분산 개최하며 다자주의 수호자 이미지 구축에 공 들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상황은 중국이 처음 APEC을 주최한 2001년과 달라졌다. 당시 상하이 APEC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두고 열렸다. 세계 시장에 편입된 중국은 개방의 최대 수혜자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로 성장했고 미국과 관세, 첨단기술, 보조금과 산업정책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오히려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강조하면서 미국의 자국 보호주의와 대조되는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관세 시한 8일 뒤 선전 APEC
올해 선전 APEC 정상회의를 대하는 미국의 접근법은 중국과 전혀 다르다. 미국도 케이시 메이스 국무부 APEC 고위관리를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다롄에 파견했지만 정책의 중심에는 미국 기업의 시장 접근과 경제적 이익이 놓여 있다. 그는 이날 현장에서 기자를 만나 "이번 회의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와 핵심 내용은 곧 브리핑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중국이 자유무역과 공급망 연결을 강조하는 동안 미국은 중국의 산업 보조금, 제조업 과잉생산, 시장 접근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개방을 둘러싼 같은 회의장 안에서 미국과 중국이 생각하는 규칙이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특히 미·중 관세 협상의 시간표가 올해 APEC 외교전의 긴장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미국의 대중 고율 관세 적용 유예 시한은 11월 10일로 예정돼 있다. 선전 APEC 정상회의 개막을 불과 8일 앞둔 시점이다. 유예가 다시 연장되든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든 미·중 통상 협상이 APEC 정상회의 직전까지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이번 회의에서 논의되는 내용과 11월 선전 APEC 정상회의 분위기가 미·중 협상 진전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회원경제의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과 안보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핵심 교역 상대국으로 두고 있어서다. 공급망 안정과 자유무역에는 동의하지만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쪽의 논리가 APEC의 공식 규범으로 굳어지는 데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 회원경제들은 미·중 갈등이 역내 무역과 투자를 위축시키는 것을 경계하면서 디지털 무역과 AI, 서비스 시장 개방을 통해 실질적인 투자 기회를 늘리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아태 공동 번영이라는 하나의 구호 아래 21개 회원경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충돌하는 모습이다.
외교가 한 관계자는 "이번 회의 장소가 다롄이라는 점도 상징적"이라며 "중국 동북 지역을 대표하는 해상 물류 관문인 다롄항은 세계 각지의 주요 항만과 연결돼 있는 핵심 거점이기 때문에 미·중 갈등이 선박과 조선, 항만장비, 반도체, 희토류 등 실물 공급망으로 번진 상황에서 협력과 연결성을 논의할 무대로 다롄을 택했다는 점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롄=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