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6,894.23

  • 178.82
  • 2.66%
코스닥

827.12

  • 4.94
  • 0.60%
1/5

<오디세이>가 묻는다… AI 시대 진짜 럭셔리는 무엇일까 [이윤경의 럭셔리코드]

페이스북 노출 0

핀(구독)!


뉴스 듣기-

지금 보시는 뉴스를 읽어드립니다.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오디세이>가 묻는다… AI 시대 진짜 럭셔리는 무엇일까 [이윤경의 럭셔리코드]

주요 기사

    글자 크기 설정

    번역-

    G언어 선택

    • 한국어
    • 영어
    • 일본어
    • 중국어(간체)
    • 중국어(번체)
    • 베트남어
    “이타카까지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줘.”

    만약 오디세우스에게 AI가 있었다면 그의 귀향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바람과 해류를 분석해 최적의 항로를 계산하고, 폭풍을 예측하고, 위험한 섬을 피해 갔을 것이다. 세이렌을 만나기 전 경고를 받았을 것이고, 키르케와 칼립소가 기다리는 곳은 애초에 경로에서 제외했을지도 모른다.

    ADVERTISEMENT


    그렇다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몇 페이지면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오디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이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길을 잃고, 유혹에 흔들리고, 동료를 잃고, 신의 분노를 사고, 수없이 좌절한다.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여정은 제거해야 할 실패와 우회의 연속이다.

    하지만 바로 그 우회가 오디세우스를 만들었다. 『오디세이』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ADVERTISEMENT


    3천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오디세우스와 정반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AI는 인간에게 수많은 최단 경로를 알려준다. 질문하면 답을 찾고, 방대한 자료를 요약하고, 번역하고, 이미지를 만들고, 글을 쓴다. 몇 주 걸리던 일을 며칠로, 며칠을 몇 시간으로, 몇 시간을 몇 분으로 줄인다.

    AI 시대의 놀라운 능력 중 하나는 어쩌면 창조보다 압축(compression)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압축하고, 과정을 압축하고, 시행착오를 압축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동차는 이동 시간을 줄였고, 비행기는 거리를 압축했으며, 인터넷은 정보에 도달하는 시간을 거의 지워버렸다. 그리고 이제 AI는 생각하고 탐색하는 시간까지 줄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얼마나 더 빨라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질문을 뒤집어보면 조금 다른 세상이 보인다.
    빨라져서는 안 되는 것도 있을까?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 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 어른이 되는 시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시간. 그리고 한 잔의 위스키가 되는 시간….


    증류가 끝났다고 위스키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투명한 뉴메이크 스피릿(New Make Spirit)은 오크 캐스크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그 뒤에는 화려한 장면없이 무거운 침묵의 세월이 흐른다.

    ADVERTISEMENT




    매일 새로운 재료를 넣는 것도, 버튼을 눌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2년, 18년, 25년. 그리고 30년 이상 그 사이 원액은 나무와 만나고 계절의 변화를 지나며 조금씩 달라진다. 일부는 증발해 사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양이 줄어드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손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Angel’s Share’(천사의 몫), 천사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속의 시간속에서 자신의 몫으로 목을 축인다.

    생산성의 언어로 보면 참으로 비효율적인 술이다. 오늘 만들어 오늘 팔 수도 없다. 18년 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할지 정확히 알 수도 없는데 지금 캐스크를 채워야 한다. 막대한 자본과 재고를 수십 년 동안 묶어둔다. 그런데 위스키에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함부로 삭제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시간이다.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에서 시작된 맥캘란(The Macallan)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난히 캐스크에 대한 집착을 만나게 된다.

    ADVERTISEMENT



    보통 위스키에서 캐스크를 이야기하면 곧 풍미로 넘어간다. 셰리, 유러피언 오크와 아메리칸 오크, 말린 과일, 바닐라, 스파이스….

    이번에는 그 향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아 보자.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맥캘란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위스키를 위해 현재의 시간과 자본을 먼저 투자한다는 사실이다. 오크를 선택하고, 캐스크를 만들고, 셰리로 시즈닝하고, 스코틀랜드로 가져와 원액을 채운다. 그리고 다시 기다린다. 오늘 시작한 선택의 결과를 오늘 확인할 수 없다. 십 수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가 아는 ‘맥캘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다.

    ADVERTISEMENT



    이것은 단순한 제조 과정이라기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묶어두는 행위에 가깝다. AI는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 역시 미래를 예측해야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예측 후에도 기다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해도 18년을 18초로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18년산 위스키가 더 좋은 위스키인가를 따지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18’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18년을 삭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오래됨’과 ‘숙성됨’의 차이가 생긴다. 영어의 aging(나이듦)과 maturation(성숙)은 비슷할 것 같지만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모든 것이 성숙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깊어지는 것은 아니며, 같은 일을 20년 했다고 모두 장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Aging은 시간이 나를 지나가는 것이고, maturation은 내가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지는 것이다. 숙성에는 반드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한 잔의 위스키와 오디세우스가 다시 만난다
    오디세우스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이타카였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그를 곧장 보내주지 않았다. 바다를 떠돌게 하고, 괴물을 만나게 하고, 유혹에 흔들리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AI의 언어로 말한다면 모두 제거해야 할 ‘friction’, 마찰이다. 하지만 그 마찰을 모두 제거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오디세우스도 사라진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타카만이 아니었다. 이타카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10년은 그가 단순히 나이를 먹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인간으로 변화한 시간이었다. 오디세우스에게 바다가 있었다면 위스키에는 “캐스크”가 있다. 둘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사이의 시간’이다.


    숙성이란 단순히 오래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나를 바꾸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이 질문은 이제 위스키를 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AI는 우리에게 경험의 결과를 빠르게 줄 수 있다. 『오디세이』를 읽지 않아도 몇 초 만에 줄거리를 요약해주고, 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가 축적한 지식을 빠르게 정리해준다.

    그러나 AI가 경험을 하기 까지 걸린 시간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오디세이』의 내용을 10분 만에 이해할 수는 있어도 오디세우스의 10년을 10분 만에 살아낼 수는 없다. 맥캘란 18년의 테이스팅 노트를 AI는 몇 초 만에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 잔이 지나온 18년을 몇 초로 줄여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인간에게 조금 불편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더 깊어지고 있는가. 시행착오를 건너뛰면서 더 현명해지고 있는가. 수많은 최단 경로를 얻은 인간은 과연 더 빨리 성숙할 수 있을까.

    누구나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면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소성이 생긴다. 숙성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배운 기술, 손이 기억할 때까지 반복한 작업,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관계, 한 자리에서 축적된 감각…과거의 럭셔리가 금과 다이아몬드, 실크와 캐시미어처럼 구하기 어려운 물질을 소유했다면 AI 시대의 럭셔리는 어쩌면 다른 희소성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시간이 들어간 것.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진 것. 그래서 한 병의 오래된 맥캘란을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진다. 그 안에 든 것은 알코올과 물, 오크에서 얻은 색과 향만이 아니다. 인간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삭제하지 않은 ‘시간’이 들어 있다. 그것이 가장 럭셔리한 것이다.

    맥캘란의 오래된 캐스크들은 어쩌면 가장 빠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대착오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더 빨리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만큼은 빨리 만들지 않을 것인가. AI가 인간에게 수많은 최단 경로를 알려주는 시대. 어쩌면 럭셔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 ‘기꺼이 시간을 통과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실시간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