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다. 지난해 아르떼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2번은 가장 좋아하는 교향곡 1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가장 좋아하는 협주곡 1위에 올랐다. 2021년 부조니 콩쿠르 5관왕을 차지한 피아니스트 박재홍(27)은 이 라흐마니노프 사랑의 최전선에 있다. 다음달 6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4곡 모두를 연주한다. 전주곡(프렐류드)은 주요 연주곡 전에 분위기를 띄우는 음악이다. 낭만주의 시대엔 전주곡 자체가 독립적인 피아노 소품으로 발전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피아노 쇼룸 파지올리에서 만난 박재홍은 연습이 한창이었다.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를 위해 건반에서 손을 내린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두고 “마음에 가장 가깝고, 가장 깊이 공부하는 작곡가”라고 했다.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면 편안해요. 어떻게 연주하고 어떻게 다음을 이끌어가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본능적으로 흘러가게 돼요.”
“협주곡 첫 연주 순간, 무대 향기도 기억나”
돌이켜보면 그의 음악 여정엔 라흐마니노프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부조니 콩쿠르 결선에서 우승을 안겨준 곡은 ‘악마적인 기교’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박재홍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공연인 2017년 루빈스타인 콩쿠르 결선도 같은 곡이었다. “이스라엘필하모닉과 협주곡을 했는데 그 무대의 온도, 향기까지 기억에 남아요. 어릴 때 ‘언제 쳐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곡을 처음 연주한 순간이었죠.”ADVERTISEMENT
박재홍은 1년여 전부터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에 몰두했다. 서로 다른 조성 24개로 하나씩 쓰인 이 전주곡들엔 작곡가의 화성학과 인생이 담겨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전주곡 오퍼스(작품번호) 23의 6번은 라흐마니노프가 첫째 딸을 처음 본 순간 바로 뛰쳐나가서 쓴 곡이라고 해요. 처음 만난 딸에 대한 서툰 사랑을 담았다고 할까요. 너무 예쁜데 꽉 안으면 망가뜨릴 것 같고, 이런 주저함과 망설임, 그러면서도 자녀에게 모든 걸 주고 싶은 마음이 이 곡에 녹아 있죠.”
또 다른 전주곡인 작품번호 23의 4번에선 호흡을 깨달았다. “성악가가 노래하는 방식을 피아노로 보여줄 수 있는 곡입니다. 노래하듯 자연스럽게 연주해야 하죠. 라흐마니노프는 가곡을 83곡이나 썼어요. 툭툭 부르는 듯하지만 전체가 합쳐져 감동을 주는 곡들입니다. 피아노도 성악가가 숨을 머금는 것처럼 프레이징(연주 흐름을 만드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피아노는 페달을 써 잔향을 담는 식으로 순간에 머물 수 있지만 성악은 숨이 끝나니 그러기가 어렵잖아요. 가곡은 순간의 유한함을 가르쳐줬죠.”
스승 언드라시 시프 “감정과 감상은 달라”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인 동시에 당대 최고 피아니스트였다. 파헤칠수록 그가 쓴 곡들은 연주자의 손길과 자연스럽게 얽힌다. 선율도 아름다워 피아니스트가 감정에 푹 빠지기 좋다. 박재홍이 경계하는 순간이다. 틈틈이 읽은 러시아 문학이 이 경계심을 일깨웠다.ADVERTISEMENT
“순간에 머물기보다 흘러가야 더 잘 읽힐 때가 있는데, 연주도 비슷합니다. 아름답게 쓰였다고 머물러 즐기다간 절정의 카타르시스에 매몰돼 큰 이야기를 담지 못해요. 오히려 덜 아름답게 쳐야 더 큰 범주에서 아름다워질 때가 있어요.” 박재홍의 스승이자 피아노 거장인 언드라시 시프도 “센티멘트(감정)와 센티멘털리티(감상)를 구분하라”고 조언했다고. 박재홍은 피아노에 앉아 두 연주를 비교해 들려줬다. 감상적인 연주는 약간 오글거렸다.
그렇다고 음악에 답을 내려는 건 아니다. 박재홍은 연주할 때마다 악보를 새로 사 다시 연습한다. “루틴이 이유 없이 반복되면 매너리즘이 됩니다. 과거에 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성하지 않으면 오류가 생기기 쉽습니다. 악보를 새로 사서 보면 과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연주가 완전히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제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음악의 방향성까지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유혹의 순간 있겠지만”
독서에서 그랬듯 박재홍은 다른 예술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최근 가장 좋았던 공연으로 콜드플레이의 지난해 내한 공연을 꼽았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음악의 힘을 느끼는 와중에 지휘 대가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클래식 음악 연주자는 교회 목사와 비슷하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클래식 감상은 콜드플레이 공연에서보다는 수동적이잖아요. 어느 정도 관객과 연주자 간 거리가 있어요. 정해진 시간에 관객은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듣는 신도처럼 있어야 하죠. 어떻게 보면 폭력적인 형태죠. 그렇기에 클래식 연주자는 얼마나 더 잘해야겠어요. 진심을 다해 음악을 만들어야 합니다.”그는 영화에서도 음악의 편린을 찾는다. 영화 ‘호프’를 봤을 땐 관객을 기분 좋게 모독하는 곡들을 떠올렸다. 드뷔시가 곡 ‘어린이의 정경’에서 ‘진한 감정을 갖고’란 나타냄말로 서주를 연주하게 해놓고 뒤이어 땡땡거리는 선율로 희롱하는 듯한 분위기를 내거나, 쇼스타코비치가 소나타에 레닌 정권을 비꼬는 듯한 요소를 넣은 경우다.
이번 리사이틀을 마치면 그는 조지아로 건너가 첼리스트 키안 솔타니와 다음달 12일 듀엣 공연을 연다. 그 이틀 뒤엔 카타르 도하에서 카타르필하모닉과 협연한다. 10월엔 BBC뮤직매거진에서 ‘올해의 관현악’상을 받은 프랑스 루아르국립오케스트라와 연주한다. 내년 5월 뉴욕 카네기홀 공연 일정도 잡혀 있다. 대륙을 넘나들며 들려주려는 음악은 무엇인지 물었다. “작곡가의 메시지를 방해하지 않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제가 드러나고 싶은 유혹의 순간도 있겠지만, 좋은 연주자보다는 좋은 해석자로 남고 싶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좋은 사람으로서 진실한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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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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