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채용공고에 연봉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더니 실제 임금이 오르는 효과가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채용 여부를 무기로 삼아 구직자와의 임금 협상에서 지나치게 낮은 금액을 제시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다. 임금 정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구인·구직 시장의 ‘가격표’가 바뀐 셈이다.
◆미국서 급확산...경쟁 통해 취업자 선택권 확보
20일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미국: 임금 투명성 정책과 채용시장 구조의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채용공고에 급여 범위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주(州)가 빠르게 늘고 있다. 콜로라도와 워싱턴·캘리포니아·뉴욕에 이어 2025년 일리노이·미네소타·뉴저지·버몬트·매사추세츠가 관련 제도를 시행했고, 메인주도 2026년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델라웨어주 역시 2027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미국의 임금 투명성 정책은 기업 내부가 아닌 '외부 투명성'을 확보하는 게 목표다. 임금 정보를 시장에 공개해 구직자 선택권을 넓히고 기업들이 서로 보상 수준을 확인하며 인재 경쟁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의 투명성 정책이 재직자의 임금정보 접근권과 임금 격차 점검 등 조직 내부에 초점을 맞춘 것과는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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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가 소개한 콜로라도주 사례에 따르면 임금 공개 의무화 이후 채용공고에 임금 정보를 명시할 확률이 약 30%포인트 상승했다. 동시에 평균 임금은 직종과 산업에 따라 1.3~3.6% 높아졌다. 다른 회사들이 얼마를 제시하는지 보이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낮은 임금을 제시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공개경쟁'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미국 온라인 채용 플랫폼 ZipRecruiter가 2023년 채용 담당자와 인사관리자 2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선 기업의 75%가 "임금 투명성이 양질의 지원자를 끌어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조건이 맞지 않는 지원자의 지원을 줄여 채용 과정이 효율적으로 바뀐다는 평가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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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자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지원서를 내고 면접까지 진행한 뒤에야 연봉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채용공고에서 급여가 공개되면 처음부터 자신의 기대 수준과 맞지 않는 일자리를 걸러낼 수 있게 됐다. 불필요한 지원과 면접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줄어드는 것이다.
여러 기업의 급여를 비교해 더 나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아가는 ‘임금 쇼핑(salary shopping)’ 현상도 나타났다. 디지털 플랫폼에 익숙한 청년층을 중심으로 채용공고의 급여 범위를 비교해 지원할 기업을 고르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반대로 '꼼수'도 등장했다. 하한액과 상한액 차이가 수만달러에 이를 정도로 급여 범위를 넓힌 사례나, 기본급 대신 성과급이나 보너스·주식 등 변동 보상을 강조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비록 기본급은 낮아도 개인 성과나 회사 실적에 따라 총 보상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이러다 보니 단순히 “연봉을 공개했느냐”를 넘어 “얼마나 제대로 공개했느냐”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캘리포니아주가 2026년부터 급여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잡는 관행을 제한하고, 기본급뿐 아니라 주식·스톡옵션·성과급을 공개 범위에 포함하도록 한 것도 이런 우회 전략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국내 채용시장에서도 채용공고에 구체적인 연봉을 공개하지 않고 면접이나 연봉협상 과정서 처우를 결정하는 관행이 일반적이다. 이에 채용 단계에서 임금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3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동정책 토론회에서 채용공고의 ‘회사 내규에 따름’등 임금 비공개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오자 일정 수준의 임금 정보를 공개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공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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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정부는 산업별 임금 정보를 취합해 구직자가 채용 단계에서 참고할 수 있는 표준 임금정보를 제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에선 여당 주도로 채용 공고에 임금 총액과 구성 항목 등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됐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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