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로봇 1위다. 정확히는 근로자 1만 명당 가동 중인 산업용 로봇 수에서 압도적 세계 1위다. 국제로봇연맹(IFR)의 2025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근로자 1만 명당 로봇 수는 1220대로 독일(449대)과 일본(446대)의 세 배에 육박한다.하지만 로봇 뚜껑을 여는 순간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정밀감속기와 제어기 등 핵심 부품은 일본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로봇 구동에 필요한 영구자석의 중국 의존도는 88.8%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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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지능형 로봇 개발 및 보급 촉진법’을 시행하고 이듬해 제1차 지능형 로봇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2013년 로봇 3대 강국, 2018년 로봇 선도국가’라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다. 의욕은 넘쳤지만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원천기술 개발을 내세우면서도 실제 정책은 완제품 개발과 로봇 보급, 공공기관을 활용한 초기 수요 창출에 기울었다. 무대에서 춤추고 전시장을 누비는 로봇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정작 로봇을 움직이는 감속기와 모터, 센서와 제어기, 소프트웨어는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됐다. 로봇을 많이 설치할수록 외국산 핵심 부품 수입도 함께 늘어나는 기형적인 구조가 굳어진 건 그 후과다.
피지컬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고 있다. AI 시대의 패권을 가를 승부처다. 생성형 AI가 글과 그림을 만드는 ‘사고형 지능’이라면, 피지컬 AI는 물리 세계를 인식하고 로봇을 제어하는 ‘실행형 지능’이다. 향후 3년이 피지컬 AI의 승부를 가를 골든타임이라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은 인터넷에 쌓인 데이터와 막대한 연산 자원을 먼저 확보한 미국과 중국이 압도적 지위를 차지해 버렸다. 하지만 피지컬 AI에 필요한 행동 데이터는 인터넷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로봇이 물건을 집고 설비를 조작하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실제 작업 과정에서 새로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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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제조 현장은 피지컬 AI가 학습할 행동 데이터의 보고다. 우리나라처럼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철강, 전자 등 세계적인 제조 현장을 두루 보유한 나라는 드물다. 숙련공의 움직임과 공정 운영 방식, 불량 대응 경험은 피지컬 AI 시대의 원유와 다름없다. LLM 경쟁에서는 다소 뒤처졌지만, 피지컬 AI 시대에는 앞서갈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벽은 기술 격차가 아니라 우리 안에 뿌리내린 열패감이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을 이길 수 있겠냐”는 의구심과 “해외 AI 모델에 일본 부품과 중국산 모터를 들여와 조립·수출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패배주의가 벌써 정책 설계에 스며들고 있다. 실패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명분 아래 해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전략이 ‘현실론’으로 포장되는 모습이다. 도전하지 않으니 격차가 벌어지고, 벌어진 격차는 다시 도전하지 않을 핑계가 되는 셈이다.
물론 글로벌 공급망은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략적 길목까지 남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피지컬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월드 모델, 제어 소프트웨어는 로봇의 두뇌이자 핵심 경쟁력이다. 여기에 학습용 현장 데이터와 서비스 구현을 위한 플랫폼까지 외국 기업에 내준다면 한국은 피지컬 AI 시대에 잘해야 조립 생산기지에 머물게 된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와 조선 분야에서 처음부터 선진국이었던 건 아니다. 선진국이 만든 시장에서 두려움을 깨고 기술과 자본, 인재에 집중했기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피지컬 AI라고 해서 못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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